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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한의 서울맛 인생맛 (54)-맛의 신세계 ‘깍두기 볶음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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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한의 서울맛 인생맛 (54)-맛의 신세계 ‘깍두기 볶음밥’
  • 손영한
  • 승인 2024.02.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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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볶음밥
깍두기 볶음밥

 

입맛이 없을 때, 날씨가 꾸물꾸물할 때, 겨울철 늦은 밤에 생각나는 음식... 새콤한 깍두기의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에 맛과 향을 더해주는 참기름을 두르면 남녀노소 좋아하는 음식으로 야식으로도 으뜸이다. 무를 육면체 모양으로 네모나게 깍둑 썰어서 소금에 절인 후 고춧가루와 갖은양념으로 버무려 만든 김치이다. 깍두기는 무의 식감이 맛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껍질째 담가야 씹히는 맛이 좋다.

깍두기 하면 설렁탕집 깍두기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김치·깍두기 맛이 좋아야 잘하는 식당으로 여기며 나름 담그는 비법이 있어 식당마다 맛이 다르고 때로는 사이다나 끓인 설탕물을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깍두기에서 생겨나오는 국물은 국밥과 국수에 음식궁합이 잘 맞아 설렁탕(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섞어 나름대로 맛을 창조하며 먹는 식도락가도 있으나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국물의 맛은 좋은 무와 양념에 의해 결정되며 특이하게도 (옛)경양식 집에서도 밑반찬으로 깍두기가 많이 쓰인다. 재미있는 조합이다.

김치 담글 때 사용되는 양념이 다 들어가고 배추 대신 무가 사용되는 것이 깍두기이다. 그중 감동젓 무는 언뜻 들으면 젓갈처럼 들리지만 무를 나박김치 모양으로 도톰하게 썰고 실파, 미나리와 밤도 납작하게 썰어 갖가지 재료와 감동젓(아주 작고 연하며 자색을 띠는 새우)이라는 특별한 젓갈이 들어가는 서울 깍두기이다. 같이 곁들이는 배추도 겉잎은 떼고 속 배추를 사용한다. 예로부터 음력 섣달그믐 끝, 땅에 묻어 두었던 무를 꺼내 갖은 해산물을 넣어 담가 먹었던 깍두기로, 대갓집에서 선물로 주고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깍두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가 주사위 모양이 아닌 납작한 골패 모양으로 썰어내는 것이 특징이며, 지금도 그렇게 담그는 집도 더러 있다.

우리 집 깍두기는 모양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 겨울에 담그는 정육면체 모양의 김장 깍두기, 새우 젓갈이 들어간 납작한 깍두기, 제철에 나는 무를 각각 조금씩 비뚤게 작게 썰어 담근 깍두기 등이 있다. 김장 깍두기는 겨우내 먹고 국물은 김치말이 국수처럼 말아먹는 것이 별미이고, 납작한 깍두기는 김밥이나 라면, 가래떡에 곁들여 먹으면 궁합이 맞는 반찬이다. 무를 잘게 기하학적으로 썰어 담근 깍두기는 우리 집 시그니처 깍두기이다.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고 경쾌하게 잘 어우러진 재미있는 모양새에는 어머니의 감성적 감각이 듬뿍 들어있어 정겹다. 숟가락으로 떠먹고 비벼 먹거나 볶음밥에 사용되는 다양한 변신의 아이콘이다. 늦은 밤 누이들과 함께 양푼에 비벼 먹는 깍두기 볶음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에 직접 짠 참기름이 황홀한 맛을 더한다.
 

‘왕십리 대도식당
‘왕십리 대도식당

 

이런 크기와 맛의 깍두기로 볶음밥을 맛있게 하는 곳으로 소 등심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왕십리 대도식당’이 있다. 이 집의 상징인 동그란 모양의 턱이 좀 높은 그릇에 떡심이 붙어 있는 등심을 올려놓으면 달궈진 무쇠판 덕에 삽시간에 구워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굽기 전에 비계 한 덩어리로 무쇠판 바닥을 코팅한 덕분인 것 같다. 아들 준오랑 가면 우리는 떡심 붙은 등심으로 주문하며 잘 구워진 떡심은 몰캉몰캉한 독특한 식감을 느끼게 한다. 똑같이 반씩 나누어 먹는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렇게 먹고 나면 마지막으로 이 집의 하이라이트인 깍두기 볶음밥이 있다. 먹고 남은 대파채로 무쇠판 바닥을 닦은 다음 깍두기와 국물을 먼저 넣어 뚜껑을 닫고 끓인 후 나중에 밥을 넣어 비빈다. 정말 맛의 신세계처럼 맛있다. 새콤한 맛의 깍두기와 그릇에 남아있던 등심 기름이 어우러져 풍부한 감칠맛을 낸다. 편편하게 펴놓은 볶음밥은 바닥에 살짝 눌어붙어 바삭한 식감의 고소한 맛을 선사한다. 준오와 나는 공깃밥을 3인분 시켜 볶아 먹으면 식당 아주머니가 웃기도 한다. 고기 먹으러 온 게 아니고 깍두기 볶음밥 때문에 온 사람들처럼... 이때 넣은 깍두기가 우리 집 잘게 썰어 만든 깍두기와 신기하게도 똑같다. 어머니가 생각나게 하는 맛으로 입에 착 감긴다.

아들과 추억이 쌓인 곳, 대도식당 가자고 하면 고기가 아니라 깍두기 볶음밥 먹으러 가는 거다. 쇠고기 전문점 치고는 밑반찬이 생양배추, 깍두기, 고추장과 파채가 전부이다. 무쇠 그릇에 국물과 함께 깍두기를 넣고 자글자글 졸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다. 썩썩 비벼주는 아주머니의 손놀림 솜씨가 내공이 있다. 그래서 더욱 맛있는지 먹어보면 머리가 상큼해진다. 후식이라 얕보면 큰코다친다.

오래된 노포 등심 전문식당의 후식인 깍두기 볶음밥. 어릴 적 추운 겨울의 긴 밤에 이불 덮고 깍두기에 비벼 먹던 추억을 이 식당에서 준오와 함께 느껴본다. 손이 많이 가는 잘게 썬 깍두기에 지금도 비벼 먹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나는 행복하다.

글·사진 손영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

 

손영한은 서울이 고향이며, 모나지 않고 정서적으로 순한 서울 맛을 찾아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한다. 
35년간 고속도로, 국도를 설계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로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 한라대학교, 인덕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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