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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마을버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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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마을버스에서
  • 채동균
  • 승인 2024.01.2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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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 옆 코스모스길
마을버스 옆 코스모스길

 

코로나 시기에 문득 이직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집 가까운 곳으로 일터를 옮겼다. 이직하고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겠다는 각오로 도보로 출퇴근할 생각을 했다. 걸어서 3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여서 실천하기 어려운 목표도 아니고 아침 시간 짧은 공복 산책이 건강에 도움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첫 한 주일은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는 긴장감에 피곤한 줄 모르고 도보로 출근을 했다. 햇살 가득해지는 아침, 밤사이 잠들어 있던 길을 나의 발걸음으로 깨우는 그 느낌도 좋았다. 그렇지만, 새로운 일터에서 하나둘씩 역할이 주어지기 시작하면서 퇴근 시각이 늦어지기 시작하고 미처 전날의 피로함을 다 지우지 못한 아침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침 산책과 같은 출근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비 오는 것이 핑계였지만, 비 오지 않는 날에도 도보 출퇴근은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걸어서 출근이라는 결심을 멈춘 이유에는 피곤함 이외에 마을버스도 한 몫이 있었는데, 집을 나서면 1분 거리에 있는 정류장에서 종로 5번 마을버스를 타면 한 번에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는 유혹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것이었다.

게으른 성품 탓에 한자리에 자리 잡고 살아온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되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마을버스를 타는 일은 그동안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을버스가 지나가면 지나가나보다 무심하게 바라본 시간만 십수 년이었다. 종로 5번 마을버스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아침 기다리고, 허무하게 놓쳐서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 없도록 아침 시작의 일상을 마을버스 오는 시각에 맞춰 생활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손에 든 휴대전화 속 세상 이야기를 들여다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이동하는 시간의 무료함을 채우곤 했는데, 일찍 눈에 세월이 찾아든 탓에 흔들리는 마을버스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 덕분에 마을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무심하게 스쳐 갈 때는 늘 같아 보였던 마을버스 밖 풍경도 관심 가지는 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마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마을버스에서 배우기도 하는데, 어느 날인가 가을 코스모스가 한껏 꽃잎을 펼친 날 마을버스 앞자리에 앉은 두 분의 대화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화려한데, 몇 년 전부터 아름다운 길이 소문이 나서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기도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길은 온전히 자연이 준 선물로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길이 아니었기에 우연히 날아온 씨앗이 아름답게 자리 잡은 것이라 짐작만 했다.

“지난 여름에 그렇게 날이 가물었는데 혼자서 물지게를 지고 올라가서 물을 주더라고요”

자연이 우연히 준 선물이라고만 여겼던 마을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은 지난 몇 해의 여름 동안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의 헌신 덕분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가을 코스모스가 한껏 피어난 날이면 잠시 그 길에 서서 꽃을 볼 수 있도록 해준 이에게 감사를 담은 말을 꽃에 속삭이는 습관이 생겼다. 마을버스가 준 고마운 습관이리라.

* * *

마을버스 길 성곽의 낮
마을버스 길 성곽의 낮
마을버스 길 성곽의 밤
마을버스 길 성곽의 밤

 

어린 시절 풀린 신발 끈을 스스로 밟고 넘어져서 크게 다친 경험이 있는 나는 걷기를 할 때 땅을 보고 걷는 습관이 있다. 크게 다침의 정도가 신발 끈을 밟으며 넘어지면서 얼굴을 심하게 다쳤다. 난생처음 병원에 실려 간 경험은 살아가면서 걷는 동안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 보니 걷는 동안에는 주변 사물을 잘 못 보는 아쉬움이 있다. 고개를 들면 투명한 호수에 한 방울 물감을 떨군 듯한 푸른 하늘과 물가의 잔영처럼 반짝이는 구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사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크고 작은 색의 변화도 있지만, 그 모습을 살펴볼 여유가 걷는 나에게는 없다.

마을버스에 오른 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볼 자유를 만끽한다. 마을버스 길은 경사가 심한 곳도 있는데, 비 오는 날 천천히 경사를 오르내리는 버스에서는 주변 경관이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지나가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신발과 옷깃을 적실 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을버스 안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천천히 가는 마을버스를 만들어준 비에 감사한 마음이기도 하다.

* * *

마을을 도는 작은 마을버스를 타보았다면 알겠지만, 보통의 마을버스는 13~14석 정도의 좌석이 있다. 그중에서 두 좌석은 출입문 가까이에 있는데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곳의 자리는 보통 대중교통 이용 약자를 위한 배려석으로 남겨두는 좌석이다. 어느 날 저녁 늦은 퇴근길 보통의 날처럼 마을버스에 올랐다. 그날은 특히나 감당하기 벅찬 세상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낸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마을버스에는 앉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잠시 주어진 휴식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버스 끝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전조등에 끌려가는 밤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점에서 탑승한 마을버스가 출발하고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탑승하는 사람들로 마을버스는 이내 만원 버스가 되었다. 그 안에서 자리가 없어서 곤란한 표정으로 버스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한 어머님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자리마다 연로하신 승객이 앉아 있던 탓에 앉을 자리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져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좌석에 앉아 있는 기력 있어 보이는 이가 나 혼자였던 이유도 있었다. 서 있던 분에게 뒷좌석으로 자리를 안내하고 나니, 곧이어 대중교통 이용 약자 배려석에 앉은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상관할 바 아니지만, 20대 중반쯤 보이는 그 승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불편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날따라 피곤함이 몰아쳤던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배려석에 앉은 승객에게 조금 미운 감정이 들었다. ‘내가 상관한 일은 아니지만’ 함께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작은 상식이 깨지는 것 같은 기분에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한두 번 더 눈이 마주쳤는데, 배려석 앉은 이에게서 미묘한 눈빛이 스쳤다. 처음에는 그 눈빛이 불쾌함이나 미안함 같은 감정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그 승객을 보고서는 혼자만의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눈에 ‘멀쩡해’ 보이던 그 승객은 한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날은 비 오는 날이라서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손에 쥐는 힘이 없는 탓인지 우산을 떨어뜨리고는 줍지 못했다. 힘이 남아 있는 한쪽 다리와 팔로 버스를 내리는 그 손에 우산을 쥐어주면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눈인사를 전했다. 그날 마을버스에서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이는 나 하나였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아직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나를, 그날 나는 마을버스 배려석에서 민낯으로 만났다.

마을버스에서 인생을 새롭게, 다시 배운다. 걷기를 포기한 게으름의 결과치고는 행복한 선물을 받고 있다. 그래서 감사하다.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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