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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주저하며 꼭 잡은 두 손에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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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주저하며 꼭 잡은 두 손에 경의를
  • 채동균
  • 승인 2023.12.3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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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 사러 가는 새벽길
베이글 사러 가는 새벽길

 

어느 따스한 일요일 아침,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이 떠진 탓에 아직 새벽 어스름이 창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평일의 치열함을 마음이 아직도 벗어던지지 못함이리라 생각하면서, 덤으로 주어진 일요일 아침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해본다. 얼마 전 책수다라는 마을 독서모임 하는 단톡방에서 오고 간 인근 베이글 빵 맛집 이야기가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올랐다. 빵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내 옆에 아직 잠들어 있는 이에게 맛있는 빵을 사다주는 것을 오늘의 임무로 정하고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가족들에게 방해가 될까 하여 조심스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로 삼은 빵집은 매일 아침 오픈런을 해야 하는 빵집이라, 일요일 아침 여유 있는 산책과는 달리 바쁜 걸음으로 빵집을 향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다시 버스를 타고 걸어서 20분을 더 가서야 도착할 목적지에 벌써 너무 많은 대기 손님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사소한 걱정을 하면서. 버스에서 내려 빵집을 향하는 길에는 건널목이 하나 있었는데 건널목을 건너는 중에 길 건너편 인도 바닥에 앉아 있는 어르신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아직 정리가 안 된 폐지 박스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오픈런을 위해 바쁜 마음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다 폐지를 줍는 어머님과 눈이 마주쳤다.

* * *

벌써 오래전이지만,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사업이라는 것을 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뜻한 대로 잘되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짧은 기간이지만,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며칠을 먹을 것이 없어서 수돗물을 끓여 마시던 날 우연히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언젠가 해결될 어려움이기에 낙담하지는 않았지만,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눈동자에 공허한 피로감이 감도는 눈이었다. 슬프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을 거울에서 마주 보면서 ‘다 죽어가는 사람 눈이구나!’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다, 그것이 그 당시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피식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 * *

종로구 북촌에 있는 런던 베이글 맛을 잘 구현했다는 빵집을 향하는 일요일 새벽, 그 길에서 마주친 여든은 돼 보이는 할머님의 눈빛에서 십수 년 전 거울에서 보았던 그 눈빛을 다시 보았다. 슬픔과는 다른, 두렵고 공허한 피로감을 담은 그 눈빛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다면 무심히 지나쳐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궁핍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찌 보면 실례일 수도 있음에도 생각이라는 것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갑에 남은 지폐 한 장을 꺼내서 할머님 앞에 내밀었다. 그 순간 서로에게 짧은 정적이 머물렀다.

‘아침 요기는 하셨어요? 뭐라도 좀 사드셔요.’

‘뭘 이런걸…. 괜찮아요.’

짧은 대화가 오가는 중에 서로의 손이 마주 닿았다. 생각과 말은 사양하셨지만, 손은 그렇지 않았다. 한 손으로 건네는 것을 30년은 세상을 더 살아오셨을 분은 두 손으로 받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나 역시 두 손을 내밀어 전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지폐 한 장을 받으시는 두 손이 지폐를 꽉 쥐어서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 * *

십수 년 전 거의 일주일을 굶었던 나는 끓인 물로 연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그대로 있어서는 죽을 것 같은 기분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씻고 숙소 건너에 있는 대형 마트 식품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름 두르고 볶은 느타리버섯, 새로 나왔다는 소고기 산적, 새우볶음, 시리얼을 차례대로 먹었다. 무릇 시식이라 하면 한두 조각 작은 컵에 담아 나누어 주는 것을 먹는 과정이지만, 그날 나는 시식 코너마다 다니면서 놓여 있는 대로 먹어 치웠다. 부끄럽다거나 눈치를 본다거나 하는 평소 나라면 고민했을 인간적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생존하기 위한 일만 온 신경이 모였다.

그 뒤에 두어 달 동안 부끄러운 마음에 마트를 갈 수 없었다. 다행히 거래처에서 대금이 지급되고, 상황도 좋아져서 짧고 격렬했던 궁핍한 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 스스로 그 일을 잊을 때 즈음 되어서야 다시 마트를 찾아갈 수 있었는데, 느타리버섯 시식 코너에 같은 분이 계셨다. 감사한 마음에 느타리버섯을 사 들고 지나려는데 ‘요즘은 괜찮으시죠?’라고 하시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몇 달은 지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살짝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담담하게 인사를 드렸다.

‘덕분에요. 그때 시식 준비하신 것을 제가 다 먹고 인사도 못 드리는 실례를 했어요.’

돌아오는 그분의 대답이 마음을 때렸다.

‘보면 알거든요. 장난스럽게 재미 삼아 먹어치우는 사람과 정말 굶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찾아오는 분은 보면 달라요. 좋아지셨으니 다행이에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날 마트 느타리버섯 코너에 진열된 느타리버섯을 거의 다 샀다. 다른 곳은 돌아보지도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느타리버섯을 구워서 먹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스스로 괜찮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고통이 섞여서 얼마 동안을 펑펑 울면서 먹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느타리버섯을 먹을 때면 눈물을 흘린다. 마음이 감추고, 기억이 속여도 몸은 기억하고 있는 법이다.

* * *

그래서일까, 괜찮다고 사양하는 말 속에 내민 두 손의 의미가 예전 내가 겪은 시간과 다르지 않음을 알 것 같았다. 사양하며 주저하는 마음과 지폐 한 장을 꼭 쥐어 하얘진 두 손에 담겨 있는 절박하고 간절함 사이 간극에서 할머님 당신도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빵집 앞에는 오픈런을 하는 빵집답게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각임에도 이미 길 줄이 있었다. 대기 줄의 끝을 찾아가 긴 줄의 한 점이 되어 예약하고, 다시 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지루함보다는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척 피로해 보이셨는데 돈을 드릴 것이 아니라 인근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다 드렸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나 후회가 들었다. 먼발치에서 지나온 자리를 뒤돌아보니 이미 할머님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오늘 시간만이라도 넉넉한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빵집에서 가족이 먹을 빵과 이웃에게 일요일 작은 선물이 될 빵을 골라 담았다. 양손에 한가득 빵 봉투를 들고 이날의 짧은 여정을 이렇게 마칠 것으로 생각하며 되돌아가는 길에 아까 그 할머님을 다시 마주쳤다. 여전히 길에 앉아 계신 그 앞에는 컵라면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분이 삼각 김밥과 라면을 들고 계셨다.

‘어머님, 왜 길에서 이러고 계셔요. 어디 가실 곳이 없으세요?’

‘여기가 편해, 날도 따뜻해서 나와 있는 거여요.’

‘어디 가셔서 제대로 된 식사를 드시지요.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세요.’

‘소화가 안 돼서 라면이 좋아요.’

‘빵은 어떠세요? 빵도 소화가 잘 안 되세요?’

‘빵 좋아하지. 없어서 못 먹어요.’

돈을 더 드리려고 했지만, 끝내 사양하면서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들고 있던 빵 봉투 두 개를 할머님 앞에 내려놓았다.

‘드셔 보셔요. 맛있는 빵집이래요. 저도 처음 먹어보거든요.’

‘고마워요. 참말로.’

결국, 이날 빵 배달은 처음 길 나설 때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전해주고 싶었던 이웃 중 한 분에게는 이해를 구하고 다음 기회를 기약했고, 가족에게 맛있는 빵을 사다주겠다는 생각으로 새벽길을 개선장군처럼 나갔던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다들 별말이 없다.

‘새벽부터 다녀오느라 고생했네’

‘아니,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어. 기억해야 할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어.’

주저하며 꼭 잡은 두 손에 경의를. 태어난 세상 모든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괜찮지 않음에도 살아갈 길을 찾는 일은 경이로운 일이며, 경의를 표할 일이다.

“할머님, 당신의 인생을 응원합니다. 주저하며 꼭 잡은 두 손에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글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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