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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가을에 부치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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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가을에 부치는 편지
  • 채동군
  • 승인 2023.09.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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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대부분 여린 잎은 녹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나뭇잎이 초록인 까닭은 생존을 위한 목적에 이유가 있는데, 식물은 엽록소를 통해 광합성으로 포도당을 만들어 살아가는 에너지로 삼기 때문이다. 너른 가지에 셀 수 없는 잎을 매달고 여유롭게 서성이는 나무도, 실상 알고 보면 햇살이 비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생명의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키 큰 나무 때문에 햇빛을 못 받을까 싶어 위로 자라는 노력도 피할 수 없는 경쟁이다. 이렇다 보니 산등성이를 살펴보면 대부분 나무의 키가 비슷해진다. 나보다 키 큰 나무가 있다면 더 키를 키워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힘들게 더 높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처 성장 경쟁에서 뒤처질 때는 충분한 햇살을 얻지 못하여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산등성이 나무들은 서로 비슷한 나무들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세상 나뭇잎이 대부분 녹색이라고 했지만, 간혹 정도에서 벗어난 잎도 있다. 한번은 식물의 종자를 싹 틔운 일이 있었는데 각종 얼룩이 놓여 있는 잎이 자라났다. 그중에는 녹색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잎도 있었는데, 좀처럼 볼 수 없어서 눈길을 이끌었다.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지라, 그 잎을 가진 새싹은 햇살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못하여 크지 못하고 스러져버렸다. 이렇듯 식물에 있어 녹색 잎이란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시선으로 볼 때 녹색이란 식물에 너무도 소중한 색이겠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 시선에 녹색이 담기는 이유는 잎 속 엽록소가 햇빛으로부터 녹색 이외의 색은 전부 받아들이고, 녹색의 파장만을 반사하는 것에 있다.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봄날을 뒤덮은 녹색은 햇살이라는 잘 차려진 식탁에서 식물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것이기에 생명을 뽐내는 푸르름의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봄의 푸른 빛만큼이나 사랑받는 색이라면 아마도 가을빛 풍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해마다 가을이 오고 온 산이 붉게 물들면 그 경치를 보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을 단풍 구경하러 가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한 시절 푸르던 잎이 노랗고 빨갛게 물든 풍광을 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가끔 마음 여유 찾고 싶을 때 찾아가는 동네 카페에는 살아온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맘때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린다. 그러다가 이내 가을 잎을 흘려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물어가는 것이 가진 아름다움에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새잎을 채워가겠지만 지금 지는 잎과는 완전히 이별한다는 생각에 아름다운 장관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가을이 노랗게 물든다고 표현하였지만, 실상 단풍은 기온 변화로 오는 화학작용이다. 보통 밤 기온이 5도 이하로 내려가면 나뭇잎은 겨울을 준비하며 노랗게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겨울을 준비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실상 가을 단풍은 생명이 성장을 멈추는 증표 같은 것이다. 봄여름 푸른 이유였던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가려져 있던 나뭇잎의 본래 색이 드러나는 과정이 단풍이다. 가을 단풍이 유난히 짙게 드는 때도 있는데, 가을비가 적어 가뭄이 이어지면 생명의 힘이 빨리 쇠잔하게 되어 색이 선명해지게 된다. 예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을 단풍으로 물든 산하가 마치 갈증으로 외치는 듯한 기분이 한동안 이어진 경험도 있다. 가을 단풍은 참 아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오래된 책 한 권을 책장에서 꺼내 보는데 가을 잎 하나가 팔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끼워 놓은 일 없었던 잎이라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 지난해 가을 산행에 함께 갔다가 잎 하나를 책갈피처럼 끼워 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가을 잎이 놓여 있던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뒤돌아볼 때 이해하게 된다. 배움의 끝에 도달할 때 비로소 처음부터 진실이었던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가을 잎이 책장 사이에서 떨어진 그날 이후 나는 가을 풍경의 아픔도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산이 물들어가는 모습 속에서 그 한 해 동안 치열하게 녹색을 빛내며 생명을 키워내며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지난 시간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이 스러져 간다는 것은 여전히 아련함이지만, 고귀한 소명을 다한 뒤 비로소 찾아오는 휴식의 시간이 선물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시간이 쌓여 변화하는 것이 단지 스러져가는 것만은 아닌,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음에 감사하다.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 시간이 쌓여가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시간은 젊은 날 주어진 아름다움을 앗아간다는 생각만 했지만, 그 시간을 뒤돌아보니 지나간 시간은 모두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한 올씩 늘어나는 흰머리도 새롭게 눈에 띄면 반갑다. 하나씩 늘어나는 흰머리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남겨준 기록이다. 한 올 한 올이 희어질 때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살아내기 위해 애썼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이 나쁘지 않다. 마치 온 산을 붉고 때로는 노랗게 물들이는 단풍처럼, 나 역시 생명을 가진 존재로 열심히 살아왔구나! 스스로 토닥여줄 수 있음에 기쁘다.

이런 상념에 혼자 싱긋 웃는데 그 모습을 아내가 본 모양이다. 혼자 뭐 그리 좋아서 싱글거리는지 묻는 아내에게 나는 답한다. 당신이 좋다고, 당신과 함께한 시간을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우리 같이 가을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어가자고.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는 대꾸를 하면서도 아내 입가에 작은 미소가 감도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 서로 아름답게 단풍들고 있구나. 그래서 이 가을이 이리도 푸근하고 행복하구나.

오늘 깊이 물드는 가을에 감사한 마음 담아 보낸다.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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