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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과 성탄절 ‘슈톨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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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과 성탄절 ‘슈톨렌’ 이야기
  • 손영한
  • 승인 2022.12.22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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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한의 서울맛 인생맛 ㉙ 

 

동지의 팥죽과 크리스마스 즈음의 독일 전통 빵인 슈톨렌은 먹는 시기가 매우 흡사하다. 동지는 우리나라 양력 명절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농경사회의 태양 숭배에서 온 기념적 축제인 날이다. 이때부터 낮이 점점 길어져서 태양의 재 탄생을 의미하며 1년을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양력으로 거의 일정하게 12월 22일 전후로 오는 것이 동지이다.

우리나라는 동짓날에 ‘동지 팥죽’을 만들어 먹는다. 팥죽은 팥알이 충분히 퍼지도록 삶은 다음, 체에 걸러서 껍질을 일일이 제거하고 가라앉힌다. 가라앉은 팥앙금을 이용하여 익힌 쌀과 함께 끓여 내면 된다. 이때 팥앙금이 눋지 않도록 계속 저어주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씻고, 삶고, 으깨고, 거르고, 끓이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정성스러운 음식이다. 팥죽을 먹는 의미는 잡귀를 쫓고 다가오는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동지에 팥죽을 먹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역에 따라 찹쌀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먹기도 하며 새알만 한 크기로 만들기 때문에 ‘새알심’이라 부르며 강원도에서는 옹심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팥죽을 만드시면 먼저 동지 제사를 지냈다. 대문과 각 방안, 책상, 마루, 부엌, 장독대, 세면실 등 집안 곳곳에 팥죽을 하얀 사발에 담아 놓고 차례로 기도를 드린 후 식구들이 모여 팥죽을 먹었다. 주로 저녁, 밤에 먹은 기억이 난다. 소금을 약간 넣어 먹는 팥죽은 구수하고 달큼하며 밥알이 혀에 닫는 느낌은 일반 죽과는 다른 묘한 부드러움과 팥의 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여기에 곁드리는 동치미나 나박김치는 뜨거운 팥죽과 어울리는 겨울철 물김치로 환상적인 맛 궁합이 되었다. 너무 맛있어서 몇 그릇 더 먹는 것은 당연하였다. 어머니는 새알심이 없는 팥죽을 만드셨으며 지금도 나는 새알심의 끈적거리는 식감을 싫어한다. 나중에 식어서 굳어진 팥죽도 부드러운 떡을 먹는 느낌이며 팥의 맛이 훨씬 진하게 느껴져 마무리까지 숟가락이 들락거린다. 우리 집은 늦가을쯤에도 시루에 쌀가루와 팥을 켜켜로 쌓아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냈으며, 이때는 북어와 막걸리를 함께 놓고 조상님의 은덕과 집안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하다.

지난해에도 아내가 팥죽을 만들었다. 옛날에는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것을 먹기만 하였지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니 정말 대단했다. 채에 걸러 만드는 팥은 손목이 아프도록 힘들여 팥앙금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니 그냥 시장에서 사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맛을 본 후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깊고 구수한 맛과 향이 어찌나 좋은지 얌체(?)처럼 차려논 팥죽을 맞바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내가 미웠다. 이제는 팥죽을 전문으로 하는 죽 전문점이 많이 생겨서 평상시에도 팥죽을 즐길 수 있으며 특히 재래시장에는 그때그때 만들어서 팔기 때문에 신선한 팥죽을 맛볼 수 있고 팥 칼국수도 별미로 인기가 좋다.
 

‘장꼬방’
‘장꼬방’

 

강남역 부근에 팥을 전문으로 하는 ‘장꼬방’이 있다. 팥죽과 팥빙수, 오묘한 맛의 찹쌀떡만 취급하는 집이다. 이곳은 국산 팥으로만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추운 겨울날 따끈하고 구수한 팥죽은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주는 느낌이며 고명으로는 찹쌀떡 몇 조각, 밤, 잣, 계핏가루를 넣어 구수하고 달지 않은 슴슴한 맛을 자랑한다. 재료에서부터 신뢰가 가는 집이다. 팥이 듬뿍 들어간 찹쌀떡은 입에 달라붙지 않아 식감이 좋으며 여름철의 팥빙수는 재료 고갈로 주문이 어려울 때가 많다. 팥을 삶는 방법에 대단한 비결을 갖고 있는 듯하다.

고대시대의 사회적 습관으로 로마인에게 동지 제사가 성대하게 행하여졌다. 태양의 힘이 제일 약한 시기에(낮이 짧은 날) 제사를 지내 태양의 부활을 기원하는 축제 행사로서 아시아권의 동짓날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예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날을 25일로 정함으로써 크리스마스를 로마 동지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독일에서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슈톨렌’(Stollen)이란 빵을 만들어 먹는 전통이 있다. 건포도, 말린 과일과 아몬드, 향신료를 넣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른 뒤 슈거파우더를 넉넉히 뿌려 만든 독일식 과일 케이크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이다. 슈톨렌은 여러 재료가 어우러져 고소하고 향긋한 맛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먹는 것보다 숙성시켜 먹어야 제맛이 나는 식품으로 크리스마스 몇 주 전에 만들어 놓는 전통이 있다. 특히 여러 종류의 건과일을 럼주에 절여 장시간 숙성시키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각종 과일과 럼주가 듬뿍 들어가 맛이 깊고 진하므로 얇게 썰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탄절 즈음에 먹는 슈톨렌과 동지에 먹는 팥죽이 시기적으로 아주 흡사하여 묘한 동서양의 동질감을 느껴본다.

 

‘플랫랜드’
‘플랫랜드’

 

이런 슈톨렌을 독일 전통 방식으로 일 년에 한번 제공하는 곳이 동교동에 ‘플랫랜드’가 있다. 이곳은 새로운 음료와 빵을 개발하고 감성과 아늑함이 느껴지는 문화 공간으로도 유명하다.

일 년 동안 준비된 슈톨렌은 우선 입이 아닌 코로 깊숙이 들어오는 향미가 상큼하다. 약간 코코넛과 무겁게 날아가는 향긋한 맛, 소프트 쿠키 같은 빵의 식감, 잘 어울리는 건과일의 조화가 멋진 맛을 이끌고 있다. 첫 맛부터 다 먹을 때까지 맛과 향이 남아 있어 두고두고 오랫동안 먹어도 좋을 듯하다. 특히 골드 럼에 일 년간 잘 숙성된 여러 종류의 건과일이 특별한 향과 맛을 내는 것 같다. 순백색의 슈거 파우더를 듬뿍 뿌려 단단한 막을 형성하여 보존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시각적으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빵 가운데 들어있는 마지팬은 슈톨렌의 특징이며 과일의 향긋함과 뭉긋이 느껴지는 신맛, 빵 속에 스며든 특유의 럼 향기와 달지 않은 달콤함이 힐링을 준다. 다음 일 년이 기다려지는 묘한 매력이 이 빵집에 있다. 아침에 갈아 만든 온두라스 커피와 같이 하니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행복감을 느낀다.

올해도 아내가 끓여주는 옛 맛의 팥죽을 먹을 수 있는 행복한 기대를 가져보며, 동지팥죽과 더불어 슈톨렌의 맛과 향에 취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글 손영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
 

 

손영한은 서울이 고향이며, 모나지 않고 정서적으로 순한 서울 맛을 찾아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한다. 
35년간 고속도로, 국도를 설계한 도로 및 공항 기술사로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 한라대학교, 인덕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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