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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일기 - 혜윰뜰에서 온 편지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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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일기 - 혜윰뜰에서 온 편지 "기억하리라"
  • 채동균
  • 승인 2022.07.28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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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 인고의 시간 뒤 맞이하는 6월, 풍성한 수확이 시작된다.
초봄 인고의 시간 뒤 맞이하는 6월, 풍성한 수확이 시작된다.

 

이맘때쯤이면 도시농부는 초봄의 사투 뒤에 소중한 수확을 얻기 시작한다. 경작하는 작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찬 바람 불 때 심어둔 다양한 채소들이 도시농부의 손을 거쳐서 저녁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다. 도시농부 나름의 고충과 애환을 담아낸 식탁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씨 뿌리며 설레던 마음이 담겨있고, 봄의 시샘 어린 찬 바람에 쓰러지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한 모종이 기대한 만큼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은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색다른 보람을 도시인에게 안겨준다.

나에게는 6월 첫 번째 휴일이면 연례행사처럼 하는 일이 하나 있다. 휴일 아침이면 이른 새벽에 혜윰뜰 텃밭에 오른다. 텃밭에 놓여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몇 년이나 지난 전자우편 한 통을 꺼내서 읽는다. 2017년 6월 7일 오후 2시 12분에 받았던 한편의 짧은 글을 텃밭 한쪽에 앉아서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초면에 죄송합니다….”

편지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이라 다 담을 수 없지만, 나로서는 무척 아픈 사연이었다. 편지의 주인공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보는 분의 따님이었는데, 경비초소에 냉방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서 초소에서 부친이 쓰러진 일을 조심스럽게 전하는 내용이었다.

열 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편지에는 수많은 고민과 슬픔, 그리고 조심스러운 사과가 가득 담겨있었다. 편지를 보낸 본인의 처지에서는 어떻게도 도울 수 없는 부친의 상황을 알려서 도움을 구해보려는 절박한 마음이 보였다. 나는 그 편지에 감히 답장하지 못했다. 무관심과 무지로 잘못한 이는 나인데, 사과를 받는 것이 사무치게 부끄러운 심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한 통의 편지는 다행히도, 모두에게 충분한 경종이 되었다. 여름을 맞이하기 전 경비초소에는 제대로 된 냉방시설이 설치되었고, 그 일이 시작점이 되어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가는 여러 이웃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우리 안의 부끄러운 일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서 모여든 이웃이 또 다른 무관심을 바로 잡기 위해서 힘을 모아 이뤄진 것이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지난 시간에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겠지만 어쩌면, 그 한 통의 편지를 받지 않았다면 우리의 무관심은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6월이 되면 그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의식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아직 이른 새벽 시간, 아무도 찾지 않는 텃밭에 혼자 앉아서 부지런한 새소리와 함께 도시농부의 푸른 채소를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공연 관람과 같다. 그 공연장 안에서 편지를 조용히 꺼내서 다시 한 번 읽어본다. 한 줄 한 줄 사이 너무 많은 쉼표에 때로는 숨을 멈추고 행간의 무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마을이 조금은 달라졌음에 안도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무관심은 뭉툭한 아픔이 아니라, 한여름 쏘아 내리는 햇살을 피할 곳 없게 만드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고통임을 배웠기 때문이다.

6월 새벽 조용한 텃밭 명상의 시간에는 작디작은 깨달음이 이어지기도 한다. 텃밭 작물을 조용히 들여다보니 작물 어느 곳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잎사귀 하나부터 줄기, 뿌리까지 제 역할을 못 하면 도시농부가 기다리는 수확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다. 지난해 봄 텃밭에는 유독 작물이 실하게 자라는 밭이 있어 궁금한 일이 있었다. 참 특별한 영양퇴비를 쓰거나 좋은 모종을 구했으리라 짐작했는데 착각이었다.

새벽 시간에 텃밭에 놀러 나온 나는 우연히 그 밭을 가꾸는 도시농부를 만났는데, 먼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보니 평범한 정성이 아니다. 잎 하나하나를 들춰보면서 상한 곳은 없나, 해충이 숨어서 가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하나씩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도시농부에게 주어진 텃밭은 비록 한 뼘 밖에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작물을 하나씩 살피다 보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정성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성과 관심, 시간과 인내라는 단순한 진심으로 이루는 성과는 비록 텃밭 수확이라는 작은 결실이지만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정성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임감 때문이라고 하신다. 비록 어느 날인가는 사람 식탁에 오를 운명을 가진 생명이지만, 태어난 목적이 수확이라면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씨 뿌린 이의 책임 아니겠냐는 웃음 섞인 말씀에서 인생 선배의 삶을 대하는 묵직한 자세가 엿보였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간절한 편지를 받고서야, 관심과 배려, 보이지 않는 곳을 살피는 책임감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는데. 누군가는 당연한 일처럼 삶으로 살아내고 있음에 고개 숙여졌다.

이른 새벽에 해충 하나씩 집어내서 잡는 것을 보고, 해충을 쫓을 수 있는 기피제 사용하는 것이 좀 더 편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렇게 하면 한동안은 편하지만, 이웃 텃밭으로 피신한 해충이 언젠가 세력을 회복해서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손수 잡는 것이 좋다고 하신다. 이런 모습을 보면 도시농부 활동이란 어찌 보면 쌓아 올린 돌담과 닮았기도 하다. 돌담이 각자의 크기대로 역할을 나누어 빈 곳을 채우고 중심을 맞춰서 크고 높은 하나의 담이 되는 것처럼 도시농부도 말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서로 간의 배려가 있을 때 올바른 수확이 뒤따르니 말이다.
 

돌담과 꽃도 때로는 스승이다.
돌담과 꽃도 때로는 스승이다.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길가에 놓인 흰 꽃의 눈이 시리게 새하얀 꽃잎을 만드는 것은 햇살을 머금는 녹색의 잎과 땅속에서 흙이 담고 있는 양분을 묵묵히 취하고 있는 뿌리의 힘일 것이다. 무심한 마음으로 스쳐 볼 때 꽃의 아름다움만 들어오지만, 바쁜 걸음을 멈추고 관심 있게 천천히 들여다보면 모두의 노력으로 완성한 생명력이 꽃잎에 담겨있음을 배운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돌담이 주는 작은 여운에 갈 길을 멈추고 돌담을 들여다보며 돌 하나하나를 세어 본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얼핏 볼 때는 눈에 보이지 않던 작은 돌들이 수없이 촘촘하게 돌담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돌 하나의 의미가 큰 돌 하나에 비해서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 나름의 쓰임새와 이유가 있어서 그곳을 채우고 있던 것이다.

잊지 않아야겠다, 몇 년 전 한 통의 편지가 가져다준 함께 사는 삶의 가치를. 실망하지 말아야겠다. 내 역할 작음이 주는 서글픔보다는 큰 돌 사이의 균형을 지켜주는 존재의 의의를 기쁘게 받아들이려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고,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라도 혜윰뜰 텃밭이 일깨워 준 작은 배려와 하루하루의 성실함이 만들어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리라.

 

도시농부의 희망이 알알이 담긴 6월생 완두콩
도시농부의 희망이 알알이 담긴 6월생 완두콩

 

몇 해 전 6월, 완두콩이 알알이 영글어가는 계절에 문득 날아든 편지 한 통이 들려준 이야기가 이웃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본다.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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