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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리더십
  • 장시정
  • 승인 2021.12.2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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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경제 장시정]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주 총리직을 그만두고 일개 시민으로 돌아갔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해임장을 받은 것은 지난 10월 26일이었지만, 12월 8일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가 의회에서 제9대 총리로 선출될 때까지 임시로 총리직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숄츠의 취임 직전까지도 독일 언론에서 이 미래 총리인 숄츠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과거 총리인 메르켈에 대한 기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미래 총리보다 과거의 총리가 세간의 관심을 더 끈다는 것은 통상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메르켈의 대중적 인기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임기 말 메르켈 총리의 지지도는 80%에 육박했다. 역사적인 기록이다.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딸이 태어난 직후 가족을 데리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무신론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교를 하라’는 루터교회의 부름에 화답한 것이다. <메르켈 리더십>을 쓴 케이티 마튼은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간 카스너 목사를 "물결을 거슬렀다"라고 표현했다. 당시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대세를 거슬렀기 때문이리라.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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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은 삼중 아웃사이더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지난 16년간이나 독일 정치를 이끌면서 유럽의 지도자를 넘어서 서방세계의 지도자로까지 우뚝 섰다. ​그는 2005년 11월 취임하여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겪으며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통하여 유럽연합을 살려내면서 유럽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2016년 브렉시트와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과 영국의 빈자리를 메꾸면서 서방세계의 지도자로까지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동독 출신, 과학자, 그리고 여성이라는 3중의 핸디캡을 극복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위업을 달성했으니, 그에 대하여도 "물결을 거슬렀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난 12월 2일 밤 독일 연방군은 국방부 청사 연병장에서 떠나는 메르켈 총리를 위한 횃불 열병식을 열었다. 16세기 프로이센 군대에서부터 시작된 횃불 열병식을 사열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 총리 그리고 국방장관(독일에서 연방군의 통수권자는 국방장관)뿐이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행사에는 메르켈이 선곡한 3개의 곡이 연주되었고, 도열한 군인들이 철모를 벗어 떠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순간은 평소라면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메르켈이 첫 번째로 선곡한 니나 하겐이 부른 "너는 컬러 필름을 잊었어"는 1974년 당시 공전의 히트곡이었다. 하겐이 펑크의 여왕으로 등극하기 전의 노래로서 펑크라기보다는 폴카 풍의 부드러운 곡조이다. 동독 사회주의의 칙칙함에 대한 비판을 담은 메르켈 세대의 숨겨진 동독 국가였다고 한다. 메르켈은 국민 63명 당 1명꼴로 정보원을 보유했던 슈타지의 감시 아래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그래도 그때의 향수가 하겐의 노래를 불러냈으리라.

2005년 11월에 메르켈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투명한 돔을 가진 제국의회에서 총리로 취임한다. 메르켈의 16년 집권 기간 중 100년도 넘는 전통을 가진 사민당은 줄곧 제2당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런 사민당의 부진은 메르켈이 성평등, 기후정책, 원전, 여성정책 등 사민당의 기간 정책을 도용했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은 좋은 아이디어라면 출처를 가리지 않고 갖다 쓰는 메르켈의 장점이다. 메르켈은 핵심적인 가치를 중시했다. 그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깊은 신앙심, 의무와 봉사에 대한 확고한 신조, 그가 항상 '쇼아'라고 일컫는 사건 때문에 ‘독일은 유대인에게 영원한 빚을 졌다’는 믿음, 푸틴이나 시진핑처럼 자국민을 감금하는 독재자들을 향한 본능적인 혐오, 표현과 이동의 자유는 정치인에게는 결코 진부하지 않은 가치라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과학자 출신답게 감정을 떼어놓고 증거를 기초로 정확하게 의사 결정하는 성향, 형용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듯이 상황을 과장하지 않고도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마르지 않는 호기심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대하는 열린 마음이 보태졌다. 영국 총리에 3번 당선된 대처와 메르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은 둘 다 훈련받은 과학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 다 노력을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고, 남성들이 판치는 정계에서 맨스플레인mansplain에 맞서야 했다. 둘 다 지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에 통달하였다.

여기에 사생활 통제를 포함한 정보 관리 능력도 한몫했다. 그는 총리실에서 새어 나가는 정보와 메시지를 철저히 통제하였고 소셜 미디어를 주도면밀하게 피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앞줄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반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교실 중간에 앉는 것을 선호했다. 총리실 가구도 재배치했다. 책상을 출입문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는데, 그 결과 방문객이 자신을 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방문객을 볼 수 있게 됐다. 이것은 슈타지 감시국가에서 청춘 시절을 보낸 경험에서 나온 자연스런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그의 정치 인생은 두 번의 배신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1989년 12월 메르켈은 "민주적 각성"이란 동독 정당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로타르 데메지에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동독 정부를 구성하면서 메르켈에게 정부 부대변인의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1990년 연말에 데메지에르가 슈타지 정보원이었다는 루머가 퍼지고 그의 정치생명을 끝내야 했을 때 메르켈은 그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정치적 멘토에 대한 첫 번째 배신이었다. 이후 메르켈은 헬무트 콜의 발탁으로 통일 독일의 첫 정부에서 여성청소년부와 환경부에서 연거푸 장관을 맡으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러다가 1999년 콜이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리자, 1999년 12월 "콜은 해당 행위를 했다"라며 대담한 정치적 소신을 밝히면서 콜의 정치 인생을 끝장냈다. 훗날 메르켈은 자신의 충성심은 한 남자를 향한 게 아니라 당의 미래를 향한 것이며, 콜에게 진 빚은 정치적인 빚이지 개인적인 빚은 아니라고 했다.

2011년 6월 메르켈의 탈원전 결정은 그의 정치생명을 연장한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지진으로 인한 핵발전소 사고로 16만 명이 소개되자, 그는 의회에서 "핵에너지에 대한 위험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핵에너지의 위험은 인간이 결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존재라는 걸 전제로 할 때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면서 탈핵 선언을 한다. 당시 요하임 가우크 대통령은 이 결정이 과학에 기초한 결정의 차원을 넘어선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와 폴란드 같은 이웃 국가에도 과학자들이 있다. 이 결정은 다음 선거에서 이기려고 내린 전략적 결정이다"라고 언급했다. 메르켈은 뜻밖에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기회가 생겼다는 걸 간파하고 재빠르게 행동한 것이다. 메르켈은 핵발전소를 폐쇄하면서 녹색당의 가장 강력한 주장 하나를 빼앗았다.

메르켈은 책을 꾸준히 읽었다. "메르켈 리더십"에서 두 권의 책을 언급했다. 그는 2013년 스키를 타다가 다친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사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1,600쪽짜리 벽돌 같은 책을 읽으면서 19세기에 유럽과 아시아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게 되었고, 허프리트 뮝클러의 1,000쪽에 가까운 책 "30년 전쟁 : 유럽의 재앙, 독일의 트라우마, 1618~1648"도 탐독했다고 한다. 1555년에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가 체결되고 70년이 지난 후 전쟁의 잔혹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또 다른 흉포한 전쟁에 맹목적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70년이 막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소위 “4강 외교”에 치중하면서, 유럽 외교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들은 하지만, 막상 그 이유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메르켈은 미국을 움직여 이란 제재를 했고, 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만주 폭격을 하지 못하게 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시에는 영국이 한국의 초청을 반대했다. 이렇듯 유럽연합은 그 자체로서도 중요한 정치, 경제의 협력대상이지만,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특히 아시아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로 우리가 대 유럽 외교를 등한시하면 안 되는 진짜 이유이다. 메르켈은 부시를 만나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광범위한 제재를 가했을 때 당시 동독에 살던 메르켈의 고향에서 오렌지 가격이 폭등한 사례를 설명함으로써 이란 제재가 필요하고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걸 암시했다. 그러자 부시가, "엔지, 당신은 참 영리하군요!"라고 화답했고 이란 제재는 실행되었다. 서구가 옛 소련 제국의 내부에 지나치게 깊이 관여하는 것을 민감한 사안으로 여기는 러시아의 정서를 잘 아는 메르켈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공화국에 나토의 지위를 주려는 부시의 계획에 반대하면서 주장을 관철했다.

몇 가지 그의 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는 임기 말년이 될 때까지 자신들을 역사의 희생자로 여기는 동독인들의 인식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동독에 살던 우리는 독일연방공화국에 합류한다는 결정을 자발적으로 내렸습니다."라면서 변화하려는 '정신적 노력'을 회피하는 오씨(동독 사람)들을 꾸짖었지만, 늘 인간 행동의 배후에 존재하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을 보지 못했다. 난민 사태가 한창일 때 키신저는, "난민 한 명에게 피신처를 제공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100만 명의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독일 문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입니다."라고 메르켈의 정책이 결코 국가를 위해 현명한 정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알렉세이 니발니는 러시아에서 푸틴의 도둑정치kleptocracy에 맞선 반독재 투쟁가이다. 푸틴 치하에서는 3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한다. 입을 닥치거나, 그를 찬양하거나, 목숨을 잃거나가 바로 그것이다. 니발니가 독극물을 마시고 베를린 병원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동안에도 메르켈은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를 취소하는 걸 거부했다. 메르켈이 추구하는 실용주의의 곤혹스러운 측면이다. 많은 비판을 초래했고, 결국 타산적인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지만, 메르켈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라고 항변한다.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의 페르소나 밖으로 유인하는 기술이 탁월한 메르켈은 16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스캔들의 기미조차 없었다. 이 경이로운 사실은 정치인 대부분이 말년에 겪는 서글픈 숙명을 피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난민정책은 독일의 자기 이미지를, 그리고 세계 다른 나라들이 옛 제3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놓았다.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국가가 세계의 도덕적 중심국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는 옷을 잘 바꿔 입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좋아하는 "겉모습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다"라는 루터교의 교리 때문이리라.

글 장시정(독일모델연구소 소장. 전 함부르크 주재 총영사) 참조 및 인용 <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필자 장시정은 1981년 외무고시를 거쳐 지난 36년 간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였으며, <독일과 한국 경제> 등을 주제로 다수 강연하였다. 카타르 주재 대사와 오스트리아 주재 차석대사, 함부르크 주재 총영사를 지냈다.
저서로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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