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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향년 89세...'12·12 사태''보통사람' '6.29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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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향년 89세...'12·12 사태''보통사람' '6.29 선언'
  • 정선우 기자
  • 승인 2021.10.26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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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1992년 공군사관학교 40기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노 전 대통령 모습.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캡처)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1992년 공군사관학교 40기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노 전 대통령 모습.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캡처)

 

[푸드경제 정선우 기자]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정당(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두 얼굴의 통치자'로 불렸다. 대통령의 권위를 풍자의 대상으로 내려놓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12·12 군사반란을 주동한 '독재자의 후예' 꼬리표를 평생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물태우'로 불린 것에 대해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매우 좋은 별명이며, 나는 물 같은 지도자로 보이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2년 대구 달성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수도사단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후 1979년 9사단장, 수도경비 사령관을 역임했고, 1980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해 제5공화국 출범 후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됐다.

1982년 초대 체육부 장관에 임명된 뒤 같은 해 4월 내무부 장관으로 전임하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노 전 대통령의 일생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떼어놓기 어렵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출신인 두 사람은 육사 11기 동기로 1952년부터 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육사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썼고,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쓴 '노태우 회고록'에서 자신의 결혼식 사회를 전 전 대통령이 봐주었다'고 썼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한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박정희 정권과 가까워지며 '정치군인'의 길로 접어든다. 

무엇보다 이들은 군부 내 사조직이자 군부의 정치 개입이라는 폐단의 근원 '하나회'를 앞장서서 결성했다. 전 전 대통령이 주도했고, 노 전 대통령 등 육사 11기가 중심이 됐다. 

하나회는 이후 사실상 '박정희의 친위대'가 됐고,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에서 각각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지내기도 했다. 

하나회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한 뒤 같은 해 군사 쿠데타인 12·12 군사반란(12·12 사태)을 주도하게 된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었고, 이 지위를 이용해 사건 수사를 총괄하면서 영향력을 키워 갔다. 

하나회 조직을 이용해 군부 요직을 차근차근 점령하던 전 전 대통령은 이후 12·12 사태를 주도했고, 당시 9사단장이던 노 전 대통령이 최전방 부대이던 9사단 예하 1개 연대 병력을 무단으로 동원해 군사반란에 가담시켰다. 이 일로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경상도 출신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이후 대통령을 거쳐 법정에 서는 궤적도 똑같이 밟는다. 

전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민주정의당(민정당) 국회의원과 내무부장관을 거쳤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임기 말 후계자로 낙점된 고인은 6월 항쟁에서 분출된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면 수용하고 '보통 사람'을 슬로건(구호)으로 내세워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

노 전 대통령은 민정당이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하기 위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13대 대통령을 퇴임한 뒤 1995년 내란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기소 됐다. 1997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전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대법원에서는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 선고가 최종 확정됐다. 

두 사람은 김영삼 정부 말기에 특별 사면됐다. 전 전 대통령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추징금을 완납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이 악화된 데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으며 오랜 기간 병상에서 생활해 왔다.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씨, 아들 재헌씨 등 1남 1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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