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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벗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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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벗에게
  • 채동균
  • 승인 2021.07.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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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 일기

해마다 이맘때면 텃밭에 오를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오랜 시간을 알아 온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 깊이 울림을 남겨준 사람이기에 어쩌면 평생을 기억하게 될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그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감히 그분을 벗이라 부르려 한다.

지난해 말에 혜윰뜰이 영화제에 참가했다. 도시농부 활동이 3년차 정도 되다 보니, 처음 도시농업을 시작하던 날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쉬워 짧은 기록 영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서울특별시의회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텃밭에서 밭일하다 영화제라니. 애초에 수상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혜윰뜰 이야기를 기억
해주는 이가 세상에 누구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으로 영화제에 응모했다.

애초에 영상 제작 일에 많은 경험이 없다 보니 별다른 도구도 없어서, 영화제 참여하면서 휴대전화 카메라 하나에 의지해야 했다. 서울특별시의회 30초 영화제에 응모한 작품은 ‘마을공동체 지원 조례가 찾아준 특별한 기적’이라 정했다. 제목을 정하는 것에 큰 고민은 없었는데, 평소 텃밭에 오를 때마다 떠올려 보았던 지난 과정을 생각할 때 혜윰뜰의 시작을 ‘기적’이라는 표현 이외에 달리 담아낼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상 제작도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혜윰뜰에서 활동하는 이웃의 일상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여과 없이 담아내려 노력했던 기억이다.

 

서울특별시의회 30초 영화제 혜윰뜰 응모작의 한 컷
서울특별시의회 30초 영화제 혜윰뜰 응모작의 한 컷

2019년 5월에서야 제대로 된 텃밭 활동을 시작한 혜윰뜰이지만, 준비의 과정은 길었다. 땅을 정돈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시간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긴 시간의 흐름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이야기는 혜윰뜰에서 온 편지를 처음 시작할 때 거의 다 이야기를 했으니 여기서 다시 꺼내지는 않으려 한다. 영화제 출품 영상에는 이 과정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여름에 씨 뿌린 무를 수확 중인 혜윰뜰 회원
여름에 씨 뿌린 무를 수확 중인 혜윰뜰 회원

영화제 출품을 위해 혜윰뜰 이웃의 일상을 인터뷰로 담다 보니 한 가지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정말 흙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텃밭 활동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는 이웃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매우 게으른 사람이다. 농부가 되었다고 게으른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았기에, 텃밭 작물 돌보고 가꾸는 일을 남들처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처음 텃밭 활동을 계획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혜윰뜰 공동체 대표를 맡고 있지만, 농부로서는 여전히 낙제 수준이다. 이웃이 함께하고 그 안에서 이웃이 소통하는 힘이 성장하는 일에 보람이 있지만, 땅과 그리 친한 사람이 아니라서 농사가 늘 어색하고 힘든 여정이라고 느끼는 날이 많았다.

 

가을 텃밭에서 인터뷰 중인 혜윰뜰 회원
가을 텃밭에서 인터뷰 중인 혜윰뜰 회원

그러다 보니 도시농부 활동이 보람은 있지만,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도시농부란 도전하고 극복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그러다 보니 이웃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지내왔다. 이런 나의 무지한 생각이 영화제 출품을 위한 이웃과의 인터뷰에서 무척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씨 뿌리며 새싹을 보살피고 수확하는 경험에서 살아 있음을 느껴요.”
인터뷰 중 텃밭 활동의 의미를 묻는 말에 짧게 답한 이웃의 이야기,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몇 년 전 혜윰뜰 텃밭이 폐허의 공터였던 시절 이곳을 되살리기 위해서 함께 힘을 더했던 그분의 말과 같았다. 그동안 어떤 이야기에서도 꺼내 본 일이 없지만, 혜윰뜰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해준 분이 그 당시 무악현대아파트 생활지원센터장이었던 조지현 센터장이다.

중요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단지 내 큰 업무를 척척 해낸 터라 혜윰뜰 텃밭을 되살리는 일도 업무 분담을 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민원이 있는 점유 주민과의 일을 해결하고 행정에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았고, 그 외 실무적인 대부분의 일은 그분의 몫이었다.

평소 하다가 안 되면 한 만큼으로 만족한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던 나였기에, 혜윰뜰 텃밭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안 되는 일이면 할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내려놓기를 반복했던 나와는 달리, 센터장은 서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 속에서 헌신했다. 어느 날인가 약속한 일의 진행 경과와 안부를 묻는데, 일은 난관에 봉착해있고 고민하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마세요”
나는 평소 내 신조대로 조언을 드렸지만, 그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공간이 목적한 것처럼 제대로 복원되고 난 뒤 이곳을 함께 이용할 이웃들이 느낄 행복과 보람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의지에 담긴 뜻이 잘 와 닿지 않았다. 영화제 출품을 위한 이웃과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예전 센터장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졌다. 어쩌다 운 좋게 성과가 나면 좋고 아니면 말자는 가벼운 생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뒤에서 진심으로 이웃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센터장은 혜윰뜰 텃밭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 치료를 위해서 퇴임했다. 반년 넘는 투병 끝에 다행스럽게도 치료를 끝내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일처럼 기뻤지만, 차마 예전처럼 같이 일하자는 부탁을 할 수 없었다. 조금 여유있는 단지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간절한 마음을 대신했다.

세상 사람 눈으로 보면 입주자대표회장과 관리사무소장으로 만난 사이일 뿐이겠지만, 난관 앞에서 같은 뜻과 마음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 우리는 말 그대로 동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지켜주려 한 고마운 인연이었다. 그 아름다운 벗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리운 벗이여, 그대가 있었기에 혜윰뜰의 오늘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어두웠던 날 등불이 되기 위해 견뎌준 시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간직하는 한 혜윰뜰은 우리 모두의 늘 푸른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나는 아직도 다시 만날 어느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5월의 파릇한 혜윰뜰 텃밭에서.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은…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서울특별시의회 30초 영화제
혜윰뜰 응모작의 한 컷 기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푸드경제신문 #혜윰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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