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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 일기-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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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 일기-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
  • 채동균
  • 승인 2021.05.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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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9
가을 수확이 끝나고 첫눈이 내린 날 혜윰뜰 설경
가을 수확이 끝나고 첫눈이 내린 날 혜윰뜰 설경

 

 

[푸드경제 채동균] 가을 수확이 끝나고 겨울바람이 찾아드는 텃밭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다. 매년 비슷한 풍경이지만, 올해 기분이 남다른 이유는 지난해 치열했던 시간이 아직도 고스란히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뜻한 대로, 기대한 대로 살아내지 못한 2020년이 사무치도록 아직 내 안에서 떠나가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 돌이켜 생각해볼 때 2020년만큼 이상한 날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는 도시농업 활동 이외에도 마을공동체 활동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 2019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활동은 이웃과 만나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고 했다. 마을탐방을 함께 하고, 생태도시농업 건강마을만들기 교육에서는 도시농업과 치유 원예에 대한 진지한 수업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웃과 이웃의 만남이 이어졌다.

 

2019년 가을, 이웃과 함께한 마을탐방 프로그램
2019년 가을, 이웃과 함께한 마을탐방 프로그램

 

마을공동체 활동에서 만난 이웃들과 마을 일을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도 태어났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일련의 마을공동체 활동이 혜윰뜰에는 부모와 같은 역할이기도 하다. 마을길을 함께 걷고 같은 공간에서 붓글씨를 쓰는 수업과 같은 활동이 공동체 탄생으로 이어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강한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했던 2019년에 비해서 2020년은 마을공동체를 지켜내는 일마저도 힘겨운 날들이었다. 얼굴 마주보는 활동이 안 되다 보니 텃밭에서조차 마스크 쓰고 조심스럽게 텃밭 경작활동을 했던 것이 2020년의 현실이었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으로 진행했던 캘리그라피 수업 화면
2020년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으로 진행했던 캘리그라피 수업 화면

 

2020년 봄이 지나도 일상이 회복될 희망이 안 보이자 혜윰뜰에서는 계획한 마을공동체 활동을 모두 취소하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건 마을공동체 활동을 이대로 이어가면,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을 것이라는 직감 같은 생각이 스쳐 갔기 때문인데, 텃밭에서 만난 이웃분의 말 한마디에 포기하려던 생각을 내려놓고 방법을 찾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만남의 형태가 꼭 얼굴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웃의 말속에는 마을공동체 활동이 어렵더라도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이 섞여 있었다. 이웃의 바람을 흘려보내기 어려워 고민하며 방법을 찾아보다 선택한 것이 비대면으로 하는 마을공동체 활동이었다.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고 했던가. 소망하는 마음에 호응하듯 마을공동체 활동도 이전과 형태는 다르지만, 함께하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캘리그라피 수업과 행복원예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호응이 좋았다. 어려운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화면 너머이기는 하지만, 익숙한 얼굴의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여하는 이웃에게는 회복의 시간이 되어 주었다. 원래의 계획과는 형식도 과정도 결과도 달랐지만, 소망했던 것 하나는 변함없이 이룰 수 있었다. 이웃과 함께 마을에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소망은 포근한 미풍이 되어 2020년에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은 안아줄 수 있었다.

2021년에는 일상의 평온함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부디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함께 소망하고 바라보다 보면 분명히 소망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줄 것이라고 믿어 보려 한다.

글 쓰는 날 마침 겨울다운 눈이 내려 텃밭을 찾아갔다. 혜윰뜰 텃밭에 휴식의 공간이 되어 주던 나무벤치에 누군가의 손도장이 조금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찍혀 있었다. 나는 계단에 쌓인 눈 치울 생각만 하고 올라왔는데 누군가는 여유 넘치는 마음으로 손바닥 도장을 찍어 놓은 것을 보니 혼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여유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내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가끔은 쌓인 그대로 두어도 좋다는 생각에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눈 쌓인 혜윰뜰을 거닐다 내려왔다.

올해는 더 천천히 여유 있게 걸어보려 한다. 도시농부의 삶 속에 여유와 행복을 채우기 위해서, 동행하는 이웃들과 더 멀리 가보기 위해서 말이다. 도시농부로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조금 늦게 가도 된다는 것, 천천히 심어도 괜찮다는 것 말이다. 천천히 심고 조금 덜 수확해도 괜찮다. 다음 기회는 우리 앞에 언제나 놓여 있으니. 지금은 그런 믿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때인가 보다. 바람이 소망하는 곳으로 불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채동균 대표…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
연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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