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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떠난 뒤에 찾아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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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떠난 뒤에 찾아오는 것
  • 채동균
  • 승인 2023.06.3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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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세상을 뒤바꾸는 큰일을 이해할만한 식견과 지혜가 없다. 겸손한 표현을 찾으려 해도 적당한 말이 안 떠오르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머리가 나쁘다. 거기에 더해서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성품이라 오십 년 넘게 살아왔지만 뒤돌아보면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머쓱하다. 게으른 성품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특별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다. 취미란 모름지기 시간을 갖고 꾸준히 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인데, 무엇 하나 그렇게 진득하게 하는 것이 없이 금방 싫증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조금 익숙해지면 금세 싫증나서 그만두기를 반복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런 나에게도 작은 취미가 있다면 그건 게임이다. 처음 게임이라는 것을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짝의 집에 놀러가는 길에 문방구 앞 작은 오락기에 오십 원을 넣고 게임을 해보라고 짝이 권했던 것이 첫 번째 경험이었다. 참 오래된 일임에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 작은 화면 속 너구리가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서 앵두를 먹고 적을 피해서 출구를 찾아가는 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전에도 등하굣길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작은 오락기를 못 본 것은 아니었다. 하굣길 육교를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동네 오락실 문이 열려 있으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화려한 소리에 유혹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오락실 게임을 처음 해본 사연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에게 오락실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하게 이야기를 들어서 오락실은 몹시 나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야 처음 만져본 문방구 앞 오락기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시작은 친구가 열어주었지만, 그 뒤로는 마니아가 되어 결국 동네 오락실 단골이 되기에 이르렀다. 나의 주 종목은 슈팅 게임류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적이 쏘는 총알을 피하고, 나의 공격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종류의 게임을 좋아했다. 무슨 일이건 즐기는 사람을 이길 방법은 없다고 했던가. 나는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동네 오락실 슈팅 게임의 제왕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새로운 슈팅 게임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게임을 클리어 하여 엔딩을 보는 수준이었다.

어떤 종류의 슈팅 게임은 게임을 클리어 하는데 30분 이상이 걸리는 게임도 있었다. 동명의 애니메이션 원작을 바탕으로 나온 ‘에어리어 88’이라는 게임을 특히 좋아했는데 전체를 클리어 하는데 꽤 긴 시간이 걸리면서도 스테이지마다 색다른 형태의 보스가 등장해서 게임을 하는 손맛이 있었다. 이 당시 오락실 게임기는 업주가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내가 살던 동네는 당연히 나와 같은 오락실 마니아 덕분에 최고 난이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최고 난이도에서는 스테이지를 클리어 할 때 얻는 보너스 포인트를 한 번만 놓쳐도 다음 스테이지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달인이 되어 있던 나는 난이도 상관없이 항상 클리어 했고 내가 게임을 하면 구경하는 관중이 모여들 지경이었다.

어느 날 사건 하나로 오락실을 더는 갈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들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락실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출입금지를 선언했다. 게임기 하나에 30분이면 5~10명이 이용할 시간을 혼자서 독점하고 있으니, 주인아저씨의 처지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오락 경력이 단절되나 싶었지만, 가정용 게임기가 보급되는 호재를 만나게 되었다. 가정용 게임기는 TV 화면에 게임기를 연결하고 집에서 오락실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이었는데, 친구들이 하나둘씩 게임기를 갖게 되면서 방과 후 공부를 빙자하여 게임을 하러 친구 집을 순례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오락이라는 것에 엄격했던 아버지에게 남들 다 가지고 있는 게임기 하나 사달라는 부탁은 할 수가 없었다. 가질 수 없으니 더 간절해져서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게임 속 비기를 찾다가 게임의 소스 코드를 수정하는 방법까지 배우게 되고, 그 덕분에 사회생활을 IT 분야에서 시작해볼 기회도 얻기도 하였다. 뭐든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지나고 보니 알게 된다.

게임기 찾아 친구 집을 전전하는 날이 이어지던 중에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그 당시 유행하던 가정용 게임기가 안방에 놓여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게임기 중에서도 최신의 기종이었는데, 요즘으로 생각하면 휴대폰 쓰는 걸 금하다가 최신 기종 휴대폰을 선물해준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사건이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의 일이었다.

요즘이야 3D 그래픽을 넘어서 VR 같은 가상환경까지 가능한 세상이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게임이 2D였다. 아버지가 선물한 게임기는 스프라이트 확대, 축소라는 기능을 이용해서 2D 화면이지만, 3D 느낌을 구현한 획기적인 게임 구현이 가능한 기종이었고, 나는 매일 밤을 새워가면서 애프터 버너 2 같은 3D 슈팅 게임에 몰입했다. 요즘의 진학 과정은 잘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이 있었고 시험을 못 보면 아주 드물게 낙방을 하는 일도 있던 시기였다. 너무 게임에 몰입해서였는지 나는 정말 겨우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전 세계 게임 산업은 관련 기술 발전과 함께 엄청난 성장을 했고 경쟁 속에서 다양한 게임이 출시되며 게임 마니아에게는 유례없는 전성기를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학업은 많이 뒷전이었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 우물을 파다 보니 관련된 업계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어서 사람 구실 할 기회까지는 다행히도 잃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 게임기를 선물 받은 그 날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 경로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머릿속을 따라다니는 궁금증이 하나 자리 잡았는데 그것은 ‘왜, 학업에서 중요한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그렇게 반대하던 게임기를 사주셨을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질문에 답을 스스로 찾을 수는 없었고, 답을 주실 분은 이미 세상에 안 계시기에 영원히 답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질문의 답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었다. 얼마 전 둘째 아이가 아픈 날이 있었는데 코로나에 걸려 한동안 고생스러운 시간을 어렵게 지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에 혼자 있는 녀석이 그 어느 때보다 안쓰럽고 측은해 보여서, 나는 혼자 지내는 방에 PC를 설치해주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게임은 조금씩만 하라’는 듣지도 않을 말을 했다. 대신 아파줄 수도, 금방 낫게 해줄 신통한 방법도 없기에 그냥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했던 것이다. 너무 쉬운 답이었는데 참 오랜 시간을 돌아서 알게 되었다. 아껴주고 싶은 마음, 감싸주고 싶은데 해줄 것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도 나와 같았구나. 그냥 최선을 다해주셨던 것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아버지 소천하신 지 7년밖에 안 지났음에도, 아버지라는 단어가 참 낯설어졌다. 휴대폰 연락처에서 ‘아버지’를 검색해본다. 익숙한 번호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거기 잘 계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애써주셔서.

문자 한 통 보내고 싶은 밤이다. 떠난 뒤에야 찾아오는 것이 아프다.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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