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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40년만에 '5‧18 추모' 조화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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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40년만에 '5‧18 추모' 조화 보내
  • 박연화 기자
  • 승인 2020.05.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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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장남 재헌씨가 2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라고 적힌 화환을 아들 노씨를 통해 보냈다

[푸드경제 박연화 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이 29일 장남 재헌씨를 통해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추모조화를 보냈다. 조화에는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라고 적혀 있다.

요양 중인 노 전 대통령은 몇 해 전부터 가족들에게 "5‧18민주묘지에 가서 참배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날 장남 재헌씨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실행에 옮겼다.

이날 5‧18묘역을 참배한 재헌씨는 '조화를 보낸 게 아버지의 뜻이냐'는 <뉴스1>의 질문에 "본인이 직접 못 오시니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1980년 5‧18학살의 장본인인 '전두환 신군부'의 핵심 가운데 한명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40년 만에 '5·18추모 조화'를 보낸 건 어떤 의미일까.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과 육사동기로 1979년 3월 육군 9보병사단장으로 전임됐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자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12‧12 직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승진했고, 5‧18 직후 전두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으로 한번 더 승진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단행과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날 24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당시 최고 권력기구인 국가보위입법위원회에 참여했고, 당연직 위원인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아 민주세력 진압 등 신군부의 정권 획득을 위한 계획과 과정에 깊이 참여했다.

신군부의 중심축인 노 전 대통령 역시 5‧18 유혈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96년 대법원에서 12·12군사쿠데타와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 자의든 타의든 '5공 청산'을 위한 위원회와 청문회가 열렸고, 5‧18의 위상이 '광주사태'서 '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되는 데 일조했다.

그는 1987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된 뒤 '민주화합추친본부' 설치‧운영을 약속했고, 1988년 1월 11일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당시 민화위는 5·18을 '광주 학생·시민의 민주화를 노력과 투쟁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높아졌고, 19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가 구성됐고, 이에 따라 전두환을 포함해 70명에 달하는 증인들이 특위에 출석해 증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한때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을 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사태는 아무 것도 아니다", "5·18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 등 5·18과 관련한 망언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장남 재헌씨가 잇달아 광주를 찾아 사죄의 뜻을 전하면서 광주의 민심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누그러지는 모습이다.

5‧18 한 관계자는 "진실을 고백하면 용서한다는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 모델이 5‧18 진상규명의 방향"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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