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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가득한 곳, 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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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가득한 곳, 오일장
  • 조우상
  • 승인 2018.11.27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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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일기

[푸드경제 오가닉라이프신문] 먹을거리든 생필품이든 원하는 물건을 아무 때나 구입하기가 어렵지 않은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무언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발품 팔아 먼 길을 나서야 했고, 그것마저 매일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날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장터가 하나의 커다란 잔치판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테다. 팔기 위해 기다린 사람,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 만나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 즐거운 놀이를 한판 벌이는 곳. 그곳이 바로 시골의 오일장이다. 시대가 변하였다 하여도, 오일장은 여전히 즐겁고 흥겹다.

일상이 숨 쉬는 장터
귀농을 하고 처음 인근 마을의 오일장에 들렀던 때가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며 오가는 길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좌판과, 길을 막는지 모르고 골목 한가운데 서서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 덕에 발걸음을 멈추기 십상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불편하고 시끌벅적한 곳. 소비자를 고려한 효율적인 동선까지 연구한다는 대형마트의 전략을 생각하면 오일장의 그것은 비효율적이다 못해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애정을 갖고 찬찬히 장터를 돌아보면 그 안에는 속 깊고 넉넉한 마음씨가 담뿍 담겨 있음을 이내 알게 된다. 장터는 장터이며 또한 일상의 공간이다. 장이 서지 않을 때엔 당연히 일상의 공간으로써 삶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라는 말이다.

마감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잠시 죽어있는 그런 특정한 공간이 아니기에, 오일장의 장터는 삶의 공간이 허용한 자리를 따라 자연스런 모습으로 생겨나고 사라진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밀어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그랬던 모습 그대로를 따라 바구니가 놓이고 포대자루가 펼쳐지며 그늘막이 드리워진다.

먹는 재미, 보는 재미
그 살아 숨 쉬는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할머니의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아주머니의 두부와 묵을 살펴보다가, 아저씨의 칼 가는 솜씨도 구경하고, 대장간 망치소리를 감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윽고 주막에 들러 뜨끈한 국밥 한 그릇과 달달한 탁주 한 사발로 속을 달래고는 한다. 방금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탁주 맛있게 먹어 놓고서, 요상하게도 파전 녹두전 지지는 소리에 그 향기까지 함께 묻어오면 발에 천근 추라도 달아 놓은 양 발걸음이 때지지 않아 한참을 애먹기도 한다. 역시 오일장을 찾게 하는 커다란 재미는 바로 먹는 재미이다.

또한 오일장의 재미는 넉살 좋은 이웃들의 웃음을 구경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무거운 바위를 이기지 못하고 세 개 중 하나의 쇠 이빨이 부러져버린 쇠스랑을 들고 대장간을 찾아 고쳐 달라 하니 ‘쇠가 부러졌는데도 나무자루는 멀쩡한 것’ 보라며 아직도 전통방식을 따라 물푸레나무를 자루로 삼는 자부심을 자랑한다. 헌데 다음에는 자루가 부러져 버려 다시 대장간을 찾으니 이번엔 ‘두드리는 솜씨가 좋으니 쇠가 단단하다’는 자랑이 이어진다. 그 익살이 재미있어 나도 대장간 작은 의자에 앉아 장구를 맞추며 웃는다.

잡다한 잡동사니 좌판을 늘어놓은 아저씨는 목도 쉬지 않는지 종일 흥겨운 노랫가락을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어대고, 국수집 사장님의 노랫가락은 잘 익은 국수발이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부드럽기만 하다. 그저 모든 것이 흥겹고 즐겁다.

농부의 땀이 서려 있는 그곳
하지만 우리 부부가 오일장을 들르는 가장 큰 보람이자 즐거움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토종씨앗’을 구하는 일이다. 골목골목에 자리한 어르신들의 바구니와 포대기 안에 담긴 싱싱한 채소, 약초, 나무뿌리와 껍질, 과일 등은 대부분 현업 농부이신 어르신들께서 손수 땀 흘려 키운 녀석들이다.

요즘은 F1종자가 워낙 폭넓게 쓰이고 있으니 그 작물들 역시 F1종자로 키워진 녀석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몇몇은 여전히 ‘잘 크고, 채종이 쉽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뿌리고 키우고 거두기를 반복한 토종씨앗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오이, 호박, 대파, 쪽파, 도라지, 상추, 아욱, 배추 등 그 종류도 아직은 참으로 다양하다. 때문에 어르신들에게서 먹을거리를 구입할 때면 반드시 토종씨앗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쭤보게 된다.

직접 씨앗 받아 심으신 것인지, 그 씨앗 좀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다른 토종씨앗은 또 없는지. 그러면 어르신들께선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참으로 친절히도 설명하여 주신다. 지금껏 젊은이의 넉살을 반가워하지 않는 어르신들은 뵌 적은 없었다. 늘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고, 넉넉한 인심으로 하나라도 더 쥐어 주신다. 먹을 것도, 씨앗도 모두. 어린 아이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아이 귀여워해주지 않으시는 어르신이 없으니 한 움큼은 기본으로 덤이다. 언제나 참으로 넉넉하다.

장이 서지 않는 날, 볼 일이 있어 장터를 지나면 오일장의 그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장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구니와 포대기 그득히 깔려 있던 골목골목에 고추와 햅쌀이 말려지고 있고, 빨래가 널려 있으며,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그리도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어른들이 자리를 비워주니 아이들이 공을 차고 강아지와 달리며 즐거운 잔치를 벌인다. 어쩌면 어른들이 장이 서는 날을 군침 삼키며 간절히 기다리듯이, 장터에 사는 아이들은 장이 끝나고 일상의 놀이터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이 서도, 장이 끝나도 장터는 언제나 잔치판이고 놀이터이다.

글·사진 | 조우상
현재 충남 부여에서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누리며 농사를 짓는 귀농 농부이다. 환경과 농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도서 <젊은 농부의 농사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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