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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 가린 아름다움의 진실
  • 김종면 논설주간
  • 승인 2018.08.3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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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닉라이프신문 김종면 논설주간]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 작가도 있다. 러시아 문학의 간판스타 도스토예프스키다.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문학의 천재들은 그것을 그토록 칭송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아름다움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실체를 숨긴 거짓 아름다움이 화려한 외양을 뽐내며 진짜 아름다움을 기만하는 세상이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밝혀내는 일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편견이 판치는, 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세상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외모에 기반을 둔 편견, 외모지상주의의 완고한 틀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특히 인간의 육체에 대한 아름다움에 절대적 기준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공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더 오래 간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중국의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은 종종 여인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기적 혹은 하늘의 선물로 봤다. 그러나 타고난 아리따운 자질, 곧 천생여질(天生麗質)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비극이 있다. 중국 미인의 ‘절대 조건’으로 송나라 이후 천 년 동안 이어진 전족 풍습이나, 중세 유럽 여성들이 입었던 보정용 속옷인 코르셋의 폐해를 우리는 기억한다. 중국 여성들은 연꽃잎처럼 아름다운 삼촌(三寸, 9.9㎝)의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코르셋은 인체 오장육부에 최대 40㎏의 압박을 가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다 철지난 얘기가 됐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절대적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충분히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미’를 향해 욕망의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미용’을 위해 저체중에 시달리는 여성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신경성 거식증이나 폭식증이 다반사다. ‘저체중 강박’에 따른 섭식장애는 사회문제가 됐다. 최근에는 식욕억제제를 과다 복용한 여성이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있었다. ‘몸신’을 향한 열망은 남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아이 조(GI Joe)’ 인형 같은 근육질 육체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미국에서는 몸짱(buff look)이 되기 위해 ‘보디빌더의 마약’ 스테로이드를 불법으로 복용하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섭식장애 등 질환과 관련된 우리의 국가 정책은 미미한 형편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신체긍정)’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는 패션쇼와 브랜드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프랑스에서는 지나치게 마른 모델의 업계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어떤 방책을 세우든 인위적인 규제에는 한계가 있다. 소비자의 신체적인 열등감을 교묘하게 건드리는 업계의 ‘자존감 장사’ 행태가 지속되는 한 외모지상주의의 종말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이어트 산업, 뷰티 비즈니스의 소비자 사냥이 기승을 부릴수록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저체중 강박 사회’에 살고 있다. 폐해가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 비만 문제보다 저체중 문제에 더 신경을 쓰라는 것은 아니다. 정책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비만인구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라고 하지만 비만은 개인을 넘어 이미 ‘국가적 재난’의 문제가 됐다. 한국의 고도 비만율은 세계 최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갈수록 심각해지는 국민 비만율을 낮추기 위해 ‘국가 비만관리 종합 5개년 대책’을 확정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2022년 41.5%로 예상되는 비만율을 2016년 수준인 34.8%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가시적 목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다, 비만인 사람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이다. 최근 서울의 한 필라테스 학원에서 고객을 ‘뚱땡이’라고 지칭한 카카오톡이 잘못 전달돼 파문을 낳았다. 또 어느 요가원에서는 회원을 ‘초뚱뚱이’라고 비하하는 온라인 인신공격 사건이 발생해 대중의 공분을 샀다. ‘마르지 않은’ 몸에 대한 공격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모멸적인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도는 극단적인 여성혐오 단어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외모품평 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반문명적인 야만행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Beauty is but skin-deep(미모는 거죽만의 것)이라는 서양 속담을 우리는 종종 입에 올린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한낱 가죽 한 꺼풀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피부 깊은 곳까지 미친다. 외모중심주의, 아니 외모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무리 겉모습보다 마음씨가 중요하다고 외친들 공염불에 그치기 십상이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에드워드 리턴은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착한 심성은 신용장”이라고 했다. 외모가 뛰어나면 그만큼 남의 추천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본체가 참된 것이어야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현대인이 외모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 한 가지 부작용이 바로 경제적 불평등의 악화다.”라고 말했다. 현대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는 경제적 관점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아름다움을 둘러싼 편견은 단순히 심미적인 이슈에만 머물지 않는다. 법적·정치적 이슈로 다뤄야 외모로 인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 진정한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이룩할 수 있다. 외모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지 않고 사회 정의와 도덕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외식(外飾)없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정당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정의사회다.

많은 이들이 영국의 무명가수 수전 보일에 열광했다. ‘볼품없는’ 외모지만 천상의 목소리를 선보인 그의 동영상은 인터넷 조회수 1억을 넘겼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루스 같은 목소리를 타고나도 ‘외모’가 달리면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는 사회라면 얼마나 잔인한가. ‘편견의 제국’은 힘이 세다. 우리는 너나없이 ‘아름다움 중독자(beauty junkies)’다. 이제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 스스로 변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인간의 절대적 욕망인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진 픽사베이


#외모지상주의 #편견의제국 #국가비만관리 #외모만능주의

 

 

 

 

 

김종면 논설주간  magazineplus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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