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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특권과 ‘잉여’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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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특권과 ‘잉여’의 덫
  • 김종면 논설주간
  • 승인 2018.04.23 0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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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경제 오가닉라이프신문 김종면 논설주간] 영화가 반드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필름이 아닌 이상 영화가 다루는 현실이란 차라리 ‘픽션’에 가깝다. 그러나 낭만적 거짓에도 소설적 진실이 있다. 아니, 영화적 진실이 있다. 영화 속 이야기에는 얼마만한 진실이 담겨 있을까.

요즘 청춘영화는 ‘잉여’의 관점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턴가 취업이나 결혼 등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에게 잉여라는 말이 붙었다. 오늘날 잉여는 단순히 ‘나머지’라는 사전적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버려진 것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무 것도 하지 않아 세상에서 불필요한 존재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막막한 청춘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호칭이자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헐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잉여들의 격투기를 의미하는 ‘잉투기’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는가 하면, 무일푼 청춘의 유럽평정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라는 영화도 있다. 유하 감독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의 아버지는 “너 대학 못 가면 뭔지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인간 알아?”라고 질책하기도 한다.

영화 속 청춘이 잉여의 모습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N포 세대’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당한’ 젊음을 그린 영화도 적지 않다. 전고운 감독의 청춘 판타지 영화 ‘소공녀’를 들여다보자. 주인공 미소(이솜)는 30대 초반 프로 가사도우미다. 그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몇 모금의 담배, 사랑하는 남자 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게 없는 자유혼의 소유자다. 생활은 늘 쪼들린다. 결국 좋아하는 것을 위해 ‘집’을 포기하고 자발적인 홈리스가 된다. 친구 집을 찾아가 가사노동을 제공하며 '하루살이'를 시작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틈나는 대로 빼어 무는 담배와 일과를 마치고 바에 앉아 즐기는 고급 위스키 한 잔,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남자 친구와 사이좋게 누워 헌혈을 하고 영화표를 받아 데이트를 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전부로 아는 미소. 그 같은 자기만족의 ‘닫힌’ 삶이 과연 바람직한 청춘의 모습인가. 친구들에게조차 그것은 이기적인 자아의 욕심에서 비롯된 '거짓 낭만'으로 치부된다.

영화 ‘소공녀’의 영어 제목 마이크로해비태트(Microhabitat)는 생태학에서 말하는 ‘미소 서식지’다. 미소 생물이 서식하는 특유의 환경 조건을 갖춘 장소를 가리킨다. 애벌레에게 거처 겸 식량이 되어 주는 낙엽이나 작은 동식물이 연명하는 터전이 되는 통나무 조각 같은 것이 미소 서식지다. 영화의 주인공 미소 또한 이 같은 미소 서식 환경에 깃들어 그곳을 자신의 우주로 삼고 자족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

미국 작가 프랜시스 버넷의 동화 ‘소공녀(A Little Princess)’는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 세라가 하녀가 되어 힘들게 살다가 아버지 친구를 우연히 만나 자신의 신분을 되찾는 이야기다. 영화는 이 동화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감독은 왜 소공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청춘의 초상에서 사랑스런 현대판 소공녀의 모습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동화 속 세라는 부잣집 아가씨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친절하며 겸손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남을 항상 배려한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세라가 고생하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자 함께 기뻐한다.

영화 속 미소는 세라처럼 어떠한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인가. 미소는 생활고로 말미암아 친구 집을 옮겨 다니면서도 “나는 지금 여행 중인 거야”라며 흰소리를 친다. 세상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다. 그러나 거기엔 책임이 따른다.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지 않는 청춘은 공허하다. 그야말로 잉여의 토양이다.

영화는 다양한 청춘의 군상을 보여준다. 대기업에 입사해 스스로 링거를 놓아가며 독하게 일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만년 고시생 남편을 보살피는 친구도 있다. 세상의 규범에 충실하고 세속의 잣대에 민감하다고 해서 속류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 경쟁은 악이 아니다.

‘Keep up with the Joneses(존스네 따라하기)’라는 영어 관용구가 있다. 이웃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원래 만화가 아더 모맨드의 동명 만화에서 맥기니스 가족이 옆집 존스네 가족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서 유래했다. 1913년 신문에 만화를 연재한 지 얼마 안 돼서 영어 사전에 등재됐다. 이웃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욕망이 거세된 삶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미소 서식지에 사는 여성 미소에게도 욕망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상승 욕망’은 아니다. 
 

잉여인간에 대한 성찰척인 탐색이 필요하다. 우리 문학사에는 일찍이 잉여인간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전후 1세대 소설가인 손창섭은 1958년 단편 ‘잉여인간’을 통해 ‘6·25전쟁이 낳은 시대적 불구성과 인간 내면의 피폐상을 고발했다. 소설에는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공허한 명분주의자 채익준, 미래가 없는 삶에 대한 보상으로 하릴없이 비현실적인 사랑에 빠져드는 수동적인 인물 천봉우가 전형적인 잉여인간으로 등장한다.

또 한 명의 주목할 인물이 있다. 손창섭의 작품에서는 드물게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치과의사 서만기다. 그는 뛰어난 의술에 훌륭한 인격을 갖춘 ‘모범인간’이다. 그런 그 역시 잉여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는 안일하게 살지 않았다. 전후의 모진 찰가난 속에서도 열네 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건사했다. ‘사람이란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해진 길을 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라는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의 구절을 인용하며 주위에 용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하는 소명감 넘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잉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만큼 지식인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소설 ‘잉여인간’은 지금부터 꼭 60년 전의 작품이다. 시대적인 배경이 달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똑같다. 그러나 잉여라는 말의 쓰임새는 그 때와 사뭇 다르다. 잉여라는 말이 범람한다. 잉여력, 잉여사회. 잉여롭다, 잉여짓, 캐잉여…. 오남용을 우려해야 할 판이다. 취업이, 결혼이 여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서 잉여가 아니다.

소설 속 잉여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쓸모없이 남아도는 인간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사회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여기면서도 사회의 규범적 요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애 쓴다. 최선을 다했지만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는 삶은 잉여가 아니다. 영화 속 미소가 달걀 한 판 사들고 친구네 집을 전전하면서도 고급 위스키를 즐기며 자기 취향대로 살아가는 것과는 구분된다. 출구 없는 폐쇄회로 같은 삶이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 될 수는 없다.

‘청춘’을 노래한 미국 시인 새뮤얼 울먼은 영혼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관의 얼음에 갇히면 스무 살의 나이라도 늙은이가 된다고 했다. 70대 후반에 이런 ‘젊은’ 시를 썼다. 청년이라면 모름지기 정신의 안테나를 곧추세워야 한다. 두려움을 떨치고 안락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아파도, 흔들려도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청춘이다, 청춘이 그런 것인 한 우리에게 잉여는 없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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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8-04-23 09:27:58
기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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