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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미투’ 운동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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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미투’ 운동의 허와 실
  • 김종면 논설주간
  • 승인 2018.04.0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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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경제 오가닉라이프신문 김종면 논설주간] 바버라 월터스는 ‘미국의 아침’과 동의어로 통하는 NBC ‘투데이쇼’의 첫 여성 앵커로 미국 저널리즘계의 프리마돈나였다. ‘인터뷰의 여왕’으로 불린 그는 하나의 인터뷰를 위해 평균 250개의 질문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의 인터뷰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1977년 그가 기획하고 주선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의 공동 인터뷰는 역사적인 첫 중동평화회담을 이끌어냈다. 같은 해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과 지프를 타고 진행한 ‘드라이빙 인터뷰’는 냉전을 녹이는 화해의 메시지가 됐다. 1976년 ABC ‘이브닝 뉴스’를 맡으며 미국 저녁뉴스 사상 첫 여성 앵커가 된 그가 받은 연봉은 100만 달러(약 10억6000만원)로 미국 방송 역사상 최고였다.

영국에서는 여성 기업인이 처음으로 ‘연봉왕’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버버리의 최고경영자(CEO) 안젤라 아렌츠는 2012년 1690만 파운드(약 296억원)의 소득을 올려 영국 350대 기업 경영진 연봉서열 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쇠퇴하던 버버리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006년 CEO로 취임한 이후 매출은 급증했고 기업가치는 치솟았다. 그는 버버리가 등한시한 핵심제품 트렌치코트를 다시 중심에 세웠고 전통의 체크무늬에서 벗어난 다양한 패턴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등 노쇠한 이미지의 버버리를 젊은 감각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바꾸었다. 그의 혁신성에 주목한 애플은 2014년 그를 수석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이들이 ‘연봉신화’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탁월한 개인의 능력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극복해야 할 ‘유리천장’이 있었을까. 미국 NBC·CNN 등에서 첫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앵커로 명성을 날린 코니 정은 여성이자 아시아계인 자신을 ‘더블 마이너리티(double minority)’라고 했다. 월터스와 아렌츠는 ‘이중 소수파’는 아니지만 적어도 여성으로서 보이지 않는 차별은 겪었을 법하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커리어 우먼도 비켜갈 수 없는 게 성별격차(gender gap)라면 그 뿌리는 도대체 얼마나 깊은 것인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성불평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미국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거물 제작자의 성추문을 폭로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간 ‘미투(#MeToo)’ 운동에 이어 이번에는 영국에서 임금 성차별을 바로잡겠다는 '페이미투(#PayMeToo)' 바람이 불어 관심을 모은다. 영국 공영방송 BBC의 한 여성 편집장이 남녀 임금차별 개선을 촉구하며 돌연 보직을 사퇴한 것이 발단이 됐다. 같은 일 혹은 같은 가치를 지닌 일을 하는 데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을 더 적게 받는다면 차별이고 불법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임금 차별에 대한 고민은 영국 의회로 이어졌고 마침내 여성 하원의원들이 행동에 나섰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남녀 임금격차 공개정책이 도입돼 종업원 250명 이상인 기업은 성별 임금 차이에 관한 자료를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올해는 공공부문을 포함해 1만여개의 기업이 자료를 냈다. 내용을 보면 영국 기업 네 곳 중 세 곳이 여성 직원보다 남성 직원에게 더 많은 급여를 지급했고, 그 격차는 평균 9.7%에 이른다. 기업들은 보수를 많이 받는 고위직에 상대적으로 남성이 많기 때문일 뿐 의도적인 차별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해명을 위한 해명인지 실제가 그러한지 내막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성별 임금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금 격차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고용주가 격차 해소를 위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세우도록 독려하는 페이미투 운동의 취지는 평가할 만하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배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성숙한 사회가 아니다.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지켜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임금 격차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테니스 스타 존 매켄로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가 BBC 해설위원으로 비슷한 일을 하는 데, 왜 매켄로의 출연료가 나브라틸로바의 10배나 되느냐고 따지는 식이라면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전후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성차(性差)에 의한 임금 격차가 아니다.
 

페이미투 운동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성별 임금 격차에 관한 정보 공개다. 임금정보 공개는 남녀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기업들에게 임금격차 해소를 강제할 수 없는 만큼 임금 실태의 민낯을 공개하도록 하는 것은 우회적인 압박수단으로 의미가 크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 월가에서도 임금정보 공개 움직임이 뚜렷하다. 주주행동주의 그룹이 금융회사들을 상대로 성별 임금 격차를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모양새다. 지난 1월 씨티그룹은 월가 대형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성별·인종별 임금 격차를 공개하고 격차 해소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어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 등도 잇따라 이러한 흐름을 수용해 임금 정보를 공개했다. 프랑스 정부는 2020년부터 남녀 임금 격차를 해소하지 않는 기업에 총임금의 최대 1%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하는 파격적인 사회개혁안을 추진해 관심을 끈다. 

한국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남녀 임금격차는 우려할 만하다. 지난달 블룸버그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글로벌 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 쿠퍼스(PwC)가 분석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남녀 임금 격차에서 한국은 37%를 기록해 OECD 29개국 중 가장 컸다. OECD 회원국 평균 16%의 두 배가 넘는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직장 내 성평등 정도를 평가해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OECD 국가 중 29위로 꼴찌였다.

우리 헌법 32조 1항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4항에는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러한 헌법 정신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성별 임금 격차는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남녀 임금격차 해소에 모든 정책적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페이미투 운동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단순히 '여성 대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만 접근해서는 지속적인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성별 임금격차 해소 문제는 다양한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난제 중의 난제다. 숲과 나무를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페이미투 운동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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