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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를 이어 조선백자의 정신을 잇다, 흙으로 전통을 빚는 사기장 김정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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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를 이어 조선백자의 정신을 잇다, 흙으로 전통을 빚는 사기장 김정옥 선생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8.01.12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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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경제 오가닉라이프신문 이시종 기자] 한평생 전통 조선백자와 씨름해온 백산(白山) 김정옥 선생을 만나면 문명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25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7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장인의 맥을 이어온 것도 그렇고, 손이 많이 가는 전통식 발물레와 망댕이 가마를 여전히 고집하는 억척스러움도 감동을 준다. 한국 조선백자의 상징적인 인물인 선생을 만나기 위해 경북 문경새재 인근에 위치한 그의 가마터를 찾았다.

모든 것이 점차 서구화되면서 우리 생활은 더욱 편안하고 안락해졌다. 이런 현대문명의 이기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우리는 소중한 몇 가지를 잃어가고 있다. 보다 새롭고 더욱 편리한 것만을 좇다 보니 우리의 전통문화마저 단지 ‘빛바랜 옛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런 시대에 전통기법 그대로 빚어낸 조선백자와 분청사기로 전 세계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명장이 있다. 국내 도예 부문 최초의 대한민국 명장(1991년)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1996년)된 백산(白山) 김정옥 선생이다. 모든 ‘쟁이’들이 천대받던 시절 도예가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생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열여덟 살 때부터 물레를 돌리기 시작했다.

7대째 전통기법대로 만들어온 장인 손길
 

작업실에 들어서자 짙은 눈썹에 강렬한 눈빛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선조 때부터 대물림해 내려온 물레를 힘차게 돌리며 작업에 몰두하는 선생의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氣)가 느껴졌다.

“백자는 감촉이 부드러우며 적당한 빙렬이 있어야 하고, 분청은 자연스러운 맛이 나야 하죠. 전기물레와 가스가마로는 쉽게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만든 이의 정성과 혼을 담을 수는 없어요.”

이런 이유로 선생은 모든 작업에서 전통적인 방법을 고집한다. 흙만 얹어도 각종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전기물레가 도입된 지 오래지만, 선생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발물레만을 사용한다. 또 가마는 장작가마인 ‘망댕이’ 가마만 쓰는데, 망댕이란 흙을 뭉친 덩어리란 뜻으로 선생 집안이 지켜온 전통가마다. 장작은 자기와 가장 궁합이 맞는다는 적송(赤松)을 사용한다. 두 달에 한 번씩 불을 지피는 가마에는 다완 100여 점이 들어간다. 하지만 작품으로 남는 것은 서너 점이 안 되고, 대부분의 그릇은 파기된다. 80∼90%의 성공확률을 보장하는 가스가마를 외면하고 97%의 실패가 눈에 보이는 망댕이 가마만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고집에는 그의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가장 한국적인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법부터 전통적이어야 합니다. 많은 작품보다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이렇게 혼을 담아 만든 탓에 선생의 백자와 분청은 형태와 빛깔에서 그만큼 남다르다. 선생의 작품은 옛 명품에 버금가는 깊이와 운치가 서려 있다. 도자기의 형태에서 전래의 도자기에 일치할뿐더러 빛깔 또한 고색에 근접하고 있다. 여기에 7대째 전해 내려오는 도자기 가문의 비법이 더해지며 일절 수식 없는 간결한 곡선이 완성된다. 이런 까닭에 선생의 도자기는 “가마에서 나오는 순간 단박에 수백 년의 나이를 먹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생이 흙을 만진 지 올해로 52년째가 된다. 열여덟 살 때부터 부친에게서 찻사발을 전수하고 물레에 앉았다.

“가업이니까 꼭 이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어려서부터 흙을 만지며 살다가 자연스럽게 일하게 된 거죠. 사실 아버님은 제가 그릇 만드는 것을 서글퍼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이 일은 예술로 인정해주기는커녕 천시하던 직업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 적성에 맞았고, 그릇을 만드는 게 좋았어요.”

고진감래, 뼈를 깎는 고통 후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다
 

 
모르는 사람들은 선생이 선조들이 닦아놓은 비법을 전수 받아 쉽게 명장에 올랐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도예가로 오르기까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난 1991년 대한민국 도예부문 명장 선정과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의 칭호를 얻기까지 손에 물과 흙이 마를 날이 없었다. 부친은 일본·인도·스웨덴 등에서 외국인들이 찾아와 배우러 올 만큼 솜씨 좋은 도공이었지만, 집안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다. 그릇 주문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가마에 오랫동안 불을 때지 못해 가마 위에 푸른 풀이 돋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선생은 중학교 중퇴로 학업을 끝내야 했다. 결국 선생은 열여덟 살 되던 해 부친으로부터 장인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동수단이 좋아져서 재료를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덜하지만, 처음 일을 배울 때는 가마터에 땔감과 흙 등 재료를 모두 지게로 지어 나르느라 어깨가 성한 날이 없었어요. 특히 겨울에는 손발이 다 트기도 해서 애 많이 먹었죠.”

고된 날의 연속이었지만, 선생은 자기가 선택한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여 년 동안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작업실에서 보냈다. 선생의 작품이 알려진 것은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다. 지난 1983년 경북공예품경진대회에 다완을 출품해 입선하면서부터 그의 작품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그후 각종 전통도예 부문에서 상을 휩쓸면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아갔다. 1986년 향토문화상, 1987년 경북문화상, 1988년 전승공예대전특별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제6회 자랑스런한국인대상(전통공예 부문)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수상했다. 또한 1984년 서울 국제무역박람회에 출품한 찻사발 10여 점이 우연히 일본 사업가의 눈에 띄어 일본에서도 알려지게 됐다. “좋다, 훌륭하다”를 연발하던 일본인은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선생의 자기를 일본에 알리고 있다.

“박람회 당시 가장 큰 바이어였던 일본의 한 사업가의 눈에 들었어요. 그후 1점에 10만원씩 팔게 돼 생활에도 보탬이 됐고, 덕분에 일본에서 전시회도 열 수 있었어요.”

6·25전쟁 이후 스테인리스 그릇이 보편화되면서 자기는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이런 실정에서 선생의 작품이 알려지자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한 문화재 전문가들은 “6·25전쟁 이후 끊어진 줄 알았던 민족사기가 아직 남아 있다”며 반가워했다. 선생의 작품에는 자기 과시나 수사적인 기교가 없다. 투박하지만 그 속에는 고고한 자연의 맛을 느끼게 한다.
백자와 분청으로 대별되는 선생의 작품은 ‘청화백자팔각병’과 ‘분청사기 철화당초문계룡산호’, ‘정호다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중 살구 빛이 감도는 분청사기 정호다완은 선생의 대표작품으로 꼽힌다. 절묘하게 떨어지는 곡선과 신비한 빛깔로 이 작품은 일본에서 1천500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한국 전통자기의 우수성 전 세계에 알리고파
 

명장의 자리에 오르면서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바로 우리 전통자기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이는 도공이 모두 떠난 자리에서 가업을 잇게 된 선생의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해오다가 해외에 많이 다니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들었어요. 우리 전통문화가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됐죠.”

선생은 “그릇을 보면 그 나라의 민족성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도자기에 대한 어지간한 상식과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동양 삼국(한·중·일)의 전통적인 도자기의 특징을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다. 중국 도자기는 크기도 크려니와 그 모양새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이에 비해 일본 도자기는 형태의 단순화와 함께 극도로 세련된 멋이 있다. 반면 우리의 도자기는 꾸밈이 없는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이들 세 나라 전 통도자기를 한곳에 놓고 비교해보면 이러한 특징은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

“미적 가치라는 것은 어느 하나의 기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어느 나라 도자기가 더 좋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미적 심미안이 있는 사람에게 오래 두고 보면 볼수록 정겨움을 자아내는 도자기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우리 도자기에 손을 들게 돼 있어요. 이런 우리 전통도자기를 해외 전시를 통해 많이 알리고 싶어요.”

선생의 말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인공미에 가깝다면 우리 도자기는 자연미에 가깝다. 기교를 다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되도록 꾸밈을 덜어냄으로써 소박한 형태에 이르고 있다는 것. 소박함이란 순수함과 상통한다. 소박함이나 순수함은 가공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처럼 세계에 우리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기법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도예가들이 우리의 전통기법을 버리고 서양 기법을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데, 이런 기법으로는 서양 작품의 흉내만 낼 뿐 우리 것을 만들어내지 못해요.”

전통기법을 전하고 이로 인해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를 만드는 것, 또 이를 세계에 알린다는 것은 짧은 시기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생은 후진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행히 선생이 전수 받은 전통도예기법의 맥은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외아들 경식 씨는 스스로 흙과의 인연을 받아들였다. 또한 손자까지도 도예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고, 선생에게서 전통기법을 배운 전수 장학생도 다섯 명 있어 전통자기의 맥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게 됐다.

“제 후손들이 계속해서 이 일을 이어갔으면 하고, 전국 어디를 가도 전통기법으로 그릇을 만드는 제자들이 많았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제자들에게 참 도공의 길을 열어줘야겠죠. 어쩌면 이것이 제 생이 다할 때까지 해야 할 숙제인 것 같네요.”

장인정신이 빚어낸 예술혼의 결정체
 

선생의 도자기에서 실현되고 있는 우리 도자기의 전통은 손끝의 기능을 극점으로까지 밀고 가지 않은 데 있다. 그릇으로서 용도에 따른 효용성에다 단출하면서도 수수한 형태미를 더하는 식이다. 되도록 기교적인 수식을 억제함에 따라 형태를 감싸고 있는 선이 단조로우면서도 간결하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씨는 “그와 같은 단순한 이미지는 장인으로서의 무명성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즉 그릇에 만드는 이의 존재를 담지 않으려는 것이다. 만일 만든 이의 존재를 부각하려면 필경 기술적인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백산 선생의 도자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장인다운 인격미로 예술적인 깊이를 실현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내왔지만 스스로 선택한 도예가의 길을 후회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50년 넘게 그저 하루를 살듯 일을 해온 것 같습니다. 자만하지 말고 돈과 기교를 향한 삿된 욕심을 끊어야 좋은 작품을 후대에 남길 수 있어요.”

어느 면에서 선생의 장인적인 자세는 우직스럽다고도 할 수 있다. 오직 그릇 만드는 일밖에 모르는 외골수의 삶은 선생에게는 거의 필연적으로 보일 정도다. 그런 삶의 태도 역시 장인적인 정신의 소산이다. 장인의 삶은 번다한 세상살이에 기웃거릴 시간이나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고 일신을 투척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기에 그렇다. 선생의 도자기에는 이렇듯 장인의 진솔한 모습이 담겨 있다.

“흙은 세상을 속이지 않아요. 흙의 성질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용도를 부여할 때 흙은 스스로를 그 쓰임새에 성실히 맞춰주죠. 또한 주무른 이의 손길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무한한 변신술도 있어요.”

도자기란 결과적으로 흙으로 만든 돌덩이라는 점에서 보면 선생의 분청이 지향하는 진정한 가치는 흙으로의 환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애써 흙냄새를 지우려 하지 않는 그처럼 천연덕스러운 태도야말로 과학문명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시대의 청정수가 아닐까 싶다.

사진 권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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