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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 백제 역사 유적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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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 백제 역사 유적 지구
  • 이은주
  • 승인 2017.02.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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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고 있는 8곳의 역사 유적은 백제가 동아시아의 문화 발전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5년 한국의 12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진행 유화미 기자│사진 충청남도청 제공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

한국에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한강 주변에 위례성이라는 성을 짓고 나라를 세웠으며, 나라의 이름을 ‘모든 백성이 즐겨 따랐다’는 뜻의 백제라고 칭하였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에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했으며, 웅진과 사비로 두 번 도읍을 천도하기도 하였다.
건국 당시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아 수도로 삼았으나 475년 고구려에게 빼앗겨 웅진, 지금의 공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를 한성 시대라고 부르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를 웅진 시대라고 부른다. 백제는 또 한 번 수도를 천도하게 되는데, 538년 성왕이 다시 도읍을 사비, 현재의 부여로 옮긴 이 시기 이후부터는 사비 시대라고 칭한다.
웅진 시대와 사비 시대를 거치며 백제는 바다 건너의 국가들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게 된다. 이때 백제는 동아시아의 문화 발전의 중심지로서 꽃을 피우게 되는데,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화시켰으며 이들 문화를 주변국들에게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이렇게 우수한 문화를 꽃피워 선진 문화 국가를 이룩해 가던 백제는 660년 신라와 당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돼 3년간의 치열한 부흥 운동을 전개했으나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멸망하기에 이른다. 비록 백제라는 국가는 역사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백제의 훌륭한 문화는 남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며 그 찬란함을 자랑하고 있다.

8개의 유적으로 이루어진 백제 역사 유적 지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백제 역사 유적 지구는 충청남도 공주시,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되어 있는 8개의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웅진 시대의 유적으로는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이 있고, 사비 시대의 유적으로는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부여 나성 그리고 미륵사지가 있다.
공산성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궁성이었다. 궁성 안에는 동성왕 때 만들어졌다는 커다란 연못 자리인 연지 및 만하루 등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를 다스렸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을 뜻한다. 1호분과 5호분까지는 백제 고유의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한 벽돌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부여 지구에는 당시의 왕궁 시설물로 보이는 대형 건물터와 상수도 시설, 지하 저장 시설 등이 발견된 관북리 유적이 있다. 이 외에도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비상시에는 방어 시설로 이용되었던 부소산성과 부여 중심지에 위치한 절터인 정림사지, 8km의 외곽 성인 나성, 7개의 고분이 남아 있는 능산리 고분군 등이 포함된다.
특히 정림사지에는 한국 석탑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일본의 탑 건축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익산시에는 수도 사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축조된 별궁인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가 있던 절터인 미륵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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