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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연애편지2-민용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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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연애편지2-민용태 시인
  • 송혜란
  • 승인 2015.06.08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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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옛날에는 “임자, 나에게 아들 하나만 낳아줘!”가 구애 방식이었지. 지금 시인에게는, “자기, 나에게 시 하나만 낳게 해줘!”해야 할까?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좋아한다는 말을 숨기기 위한 은근 슬쩍 불건전한 제의지. 하하.

그러나 건전 생활보다 불건전한 오늘이 더욱 영원한 때도 있어. 괴테는 나이 80에 나이 어린 여린 애인을 만나 평생 끝내지 못한 <파우스트 2권>을 끝냈다고 하지. 그 마지막 구절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나를 인도한다.”였던가?

시인이란 미친놈이지. 미친 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영감이거든. 좀 고상하게 말하면 시인은 신들린 사람이야. 산신령이나 동자신, 처녀귀신에게 홀린 무당이나 시인이나 한 통속이야. 시인 끼와 미친 끼는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다고 하지. 스페인 속담이야.

그런데 밥 먹고 애 낳고 살다 보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게 나의 예쁜 시인과 미친놈이야, 하하. 그래서 가정 가지고 나이 들어 계속 시인인 것은 두 번 미친놈들이지. 이런 걸 바람둥이라고 그래. 하하.

그래서 너와 나의 사랑은 바람이야. 바람이니까 영원하지. 집이나 가정이나 빌딩은 영원하지 않아. 영원한 것처럼, 그러나 늘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을 뿐이지. 어제와 내일과 마음은 대기처럼 늘 오염되어 있어. 나의 마음은 미세먼지투성이야. 나는 미세먼지를 ‘미스 먼지’라고 부르지.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하하. 그러나 바람피우다 너를 만나면 푸른 너 앞에 내가 있음을 새삼 푸르게 느껴.

너를 만날 때 나는 우리 어린 시절 밤늦게 숙제하다 마당에 나왔던 기억이 나. 하얀 달이 우리 신발을 말갛게 닦아놓곤 하던 시절. 사랑은 어린 시절의 부활인가 봐. 그러나 시인과 바람둥이는 두 번 미친놈. 곧 헤어져야 하지. 밖에서 눈치 보이니까. 서로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바람과 구름을 포기할 순 없지, 우리가 늘 용감해야 해. 물론 눈물은 늘 준비하고. 황영자 시인은 ‘구름’ 이 시에서 그러더군. “너무 무거우면/울어버리지 뭐”

바람이 올 때는 가슴으로 오지만 갈 때는 눈시울을 스쳐가지. 바람에게 만남과 헤어짐은 밤나무에게 밤꽃이냐 밤이냐의 질문이지. 바람은 사랑이야. 밤나무는 사랑이야. 사랑은 꽃만이 아니야. 밤꽃이 간다고 밤을 던져버리지 마. 이 슬픔도 아껴. 눈을 뜨고 슬픈 나를 봐. 너를 봐. 사람은 사랑이야. 사람의 이 슬픔을 봐.

글 민용태 시인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
마드리드콤플루텐세대학교 대학원 서반아문학 박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68년 창작과 비평 데뷔
1969년 마차도문학상 수상
저서 <바람개비에는 의자가 없다>, <시에서 연애를 꺼내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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