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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134호, 권진규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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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134호, 권진규 아틀리에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06.04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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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⑬

 

우리나라 조각예술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권진규다. 외국의 것을 좇는 세대를 비판하고 한국형 리얼리즘을 추구했으나, 당시 고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과 예술혼은 후세에 불멸이 되어 남았다.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사진제공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참고자료 권진규의 馬頭(박미화)|참고서적 권진규(마로니에북스)

한국 근대 조각 선구자 권진규 생가

서울시 동선동 3가, 굽이진 계단길 옆 언덕배기에 덩그마니 자리한 권진규 아틀리에. 이곳은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의 삶과 예술혼이 깃든 곳으로, 점토를 구워 만드는 조각 기법인 테라코타와 미술 교과서에 실린 대표작 ‘지원의 얼굴’로 대중에 알려져 있다.
권진규 아틀리에는 조각가 권진규(1922~1973)가 작품 활동을 했던 창작 산실이다. 권진규가 직업 지은 작업실로, 일본에서 귀국한 1959년부터 생을 마감한 1973년까지 14년간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그 독특함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 등록문화재 134호로 등록되었으며, 2006년에 권진규의 여동생 권경숙이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해 보전하고 있다. 건물과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전예약을 통해 월 1회 개방하고 있으며,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가 입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기증을 통해 확보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문화유산 보존 첫 사례다.
권진규 생가는 오른쪽 문과 왼쪽의 작은 문, 두개가 있다. 원래 그 사이 공간에는 벽이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 문으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살림채, 왼쪽 문으로는 작업실로 통하게 설계되었다. 왼쪽 문은 오직 그만이 사용했고, 지금은 그 뜻을 이어 왼쪽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오른쪽 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권진규 아틀리에다. 아틀리에는 복층 구조에 유독 지붕이 높은 형태이다. 지붕이 높은 이유는 기념물 제작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마와 우물, 흙 저장 공간 등과 작품을 전시하던 진열대와 다락방 등으로 꾸며져 있다. 벽과 바닥에는 작업의 흔적이 남아 있다. 10평이 채 되지 않는 소박한 공간이 작품에 대한 열정의 온기로 가득 메워진 듯하다. 바로 이곳에서 <영희>, <스카프를 맨 여인>, <자소상(自塑像)> 등 한국미술사에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탄생했다. 권진규 아틀리에는 한국조각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예술가 권진규 선생의 작품과 작품 활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작품 산실로 의미가 크다.

불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다 흙으로 돌아간 권진규

1922년, 권진규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유년 시절 권진규는 공작에 재능을 보여, 강변에 자주 가서 모래나 점토를 가지고 개나 새 등 다양한 것들을 만들며 놀거나, 연필꽂이나 마루의 발판 등을 만들었다. 1935년에는 함흥 상공회의소의 전시회에 목제실패를 이용해 만든 <사슴>을 출품해 입상하기도 했다.
1943년, 권진규는 신학기 시작에 맞춰 일본으로 돌아가는 형 진원(당시 일본의과대학에 재학중)과 함께 도쿄를 방문해 음악을 감상하던 중, ‘문득 음을 양감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조각가를 목표로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23살이 된 권진규는 함흥의 미술강습소에서 미술동맹에 가입하고 정식으로 작가의 길을 갈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이듬해 월남해서 이쾌대 선생이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그런 그가 처음 조각과 만난 것은 속리산 법주사였다. 근대 최초의 조각가이자 평론가, 사회 사상가였던 정관 김복진 선생이 법주사 미륵대불을 제작하다 돌아가시자, 그의 수제자였던 윤효중 선생이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면서 약 6개월 간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권진규는 김복진의 많은 유작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로댕의 인상파 조소예술과 친연성이 깊지만 그렇다고 고전주의 또는 이상주의와도 무관하지 않은 김복진의 세계는 조선 또는 일본을 아우르는 동북아시아 불교미술이 갖춘 내면의 고유성까지 머금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눈뜸이었다. 이 무렵에는 형이 악성폐렴으로 병사했는데, 이 혈육의 죽음은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세계에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심화시켰다.
1959년 귀국해서는 한국의 전통미학을 탐구하며, 테라코타와 건칠 작품을 주로 제작하여 3회의 개인전을 가지게 되는데 그 중 두 번째는 일본에서 전시회를 가져 매우 좋은 호응과 여러 가지 호의적인 제의를 받기도 했다. 당시를 회고한 그의 여동생 권옥연은 이때가 권진규 생애 최고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1965년에는 자소상, 초상조각, 마상, 부조, 여인나부상 등 일련의 테라코타 작품으로 당시 한국 조각계에서는 보기 드문 조각개인전을 서울신문회관에서 가졌다. 그러나 당시 한국 조각계는 왕성한 추상조각의 실험과 새로운 재료의 수용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로서, 권진규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고답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조형세계라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참신한 구상과 현대조각에 망각되었던 재료 테라코타의 재질감은 독보적인 양식으로 국내 미술계에 알려졌고, 그가 다녔던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교수로 와달라는 초청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예술보다 조국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모든 요청을 뿌리쳤다.
한국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고, 권진규는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안정된 직장 하나 없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작가적 사명으로 스스로를 소외의 경지에 몰고 외롭게 살던 그는 선천적인 고혈압과 신장병 등으로 끝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테라코타·옻칠 응용한 흉상
한국전통 미학과 리얼리즘 추구한 작품 세계

권진규는 주로 사람의 얼굴, 말, 닭 같은 동물상을 직접 만든 가마에서 흙으로 구워 제작하였는데 작품 표면에 유약을 칠하지 않아 붉은 흑색을 띠어 독특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그 당시 조각가들이 우리나라 전통적인 구상세계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삼국시대 토우에 뿌리를 둔 테라코타와 건칠 기법을 새롭게 발굴해 한국적 리얼리즘을 조각의 세계에 정립했다. 그가 끝내 놓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한 것은 '한국 리얼리즘'의 정립이었다.
권진규는 자소상을 많이 만들었다. 특히 흙의 형상을 석고로 떠서 청동이나 다른 견고한 물질로 바꾸지 않고, 말려서 불에 굽는 테라코타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가 작품을 만들어 발표했던 1960년대의 한국 조각계는 사실 테라코타라는 분야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65년 9월 서울의 수화랑에서 첫 초대 개인전을 열자 언론에서는 “그가 침묵을 깨고 조각전을 열었을 때 권 씨의 존재는 당장 클로즈업되었다. 그는 ‘테라코타’를 중심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한국에선 새로운 조각분야의 제시였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았다(경향)”고 언급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신선한 것이었다. 그의 자소상은 숭고한 표정은 물론 구도자의 심리까지도 보여주며, 진지한 구도 자세로 작가와 조각 대상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양조각은 그들 집단에 뿌리 박힌 사상, 생활, 전통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이 만든 새로운 조형 이념은 그들의 생활과 전통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내면의 충격 없이 그들을 좇아가기만 한다면 결국 흉내만 내는 자기 상실자에 지나지 않는다.
-권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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